[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61·끝] 요한복음 21장 15-23절 강해
21:15 저희가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주님은 먼저 이들을 목양하고 다음에 ‘너희들도 목양을 하라’고 하시지, 목양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목양을 부탁하지는 않으신다. 주님이 여러분을 주님을 섬기는 자들로 만들려면, 먼저 여러분을 목양하실 것이다. ‘조반을 먹은 후에’라고 했다. 주님은 다 섬세하시다. 조반을 먹는 시간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베드로를 부르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 이것은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를 부르셨던 이름이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사랑의 문제를 제기하셨다. ‘이 사람들보다’는 영어로는 ‘이것들보다’이다. 즉 그물, 배, 고기보다, 다른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주님은 ‘이것들보다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독점적인 사랑(exclusive love)이다. 이런 사랑이 아니면 주님을 섬길 만하지 않다. 주님도 사랑하고 다른 것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고 이것저것 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신다. 그분은 다른 것과 동일하게 사랑하는 여러 가지 중의 한 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당신 자신만 사랑하는 그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신다. 이러한 사랑이 아니면 주님은 당신의 양을 맡길 수 없으시다.
주님은 ‘나를 더 사랑하느냐(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고 하셨다. 차이가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께서 아시나이다(yes Lord, you know)’라고 대답했다. 십자가 전이었다면,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주님, 그것을 말이라고 물으십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 것도 각오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변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목에 힘을 주어서 주님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가 말씀드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아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에 대한 확신이 무너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사랑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도 없다. 그렇게 했다가 세 번이나 보기 좋게 넘어진 사람 아닌가? 이렇게 자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 주님은 당신의 양들을 부탁하실 수 있다.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의 양떼를 목양하기 힘들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무런 보상 없이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 사랑이 비결이다. 섬기는 우리에게 대가도 주지 않는데, 보상도 해 주지 않는데, 알아주지도 않고 도리어 항상 어려움만 끼치는데 우리는 왜 섬겨야 하는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는 일만 있을 것이다. 일에 대한 대가만 있을 것이다. 돌봄을 받은 대신 돈을 내야 하는 그러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삯꾼이 하는 일이다. 주님은 목양의 본질을 말씀하고 계신다.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여기서 주님은 ‘네가 이것들보다’를 빼고 단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사랑이 핵심이다. 주님은 다시 한 번 ‘내 양을 치라’고 하셨다. 그런데 첫 번째는 ‘내 어린 양’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 내 양’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주님에게는 어린 양도 있지만 조금 자란 양들도 있다. 조금 자란 양들도 목양의 대상이다.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째로 또 말씀하신다. 세 번이나 물으시니 베드로가 근심했다. 더욱 확신이 없어진 것이다. 왜 세 번씩이나 물으시는지 근심이 생겼다. 혹 내가 또 무슨 실수할 일이 또 있단 말인가?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자기 확신보다 주님에 대한 신뢰가 더 커졌다. 그리고 주님은 세 번째 부탁하신다. 이것이 주님이 양육하시는 온전한 방법이다. 그 새벽, 아주 알맞은 때를 택하셨다.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채워 만들어 주셨다. 다음에 먹이셨다.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러분도 부활하신 주님의 이 부탁을 다 받으시기 바란다. 어찌 베드로에게만 부탁하신 것이겠는가? 첫째로 여러분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다음은 어린 양들을 먹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조금 더 자라면 그들을 치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주님을 목자장으로 모시고 목양하는 선한 목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많은 양떼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목양을 받고 공급을 받고 돌봄을 받아 잘 자랄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의 큰 상급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은 마지막 부록 같은 한 장을 추가해서, 베드로에게 그의 운명을 말씀해주시고 ‘나를 따르라’신 말씀을 기록했다. 특히 두 사람, 하나는 요한이고 하나는 베드로에 대해서다. 요한은 글을 기록한 당사자이다. 우리는 먼저 요한을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을 많이 했지만 요한에게는 말을 별로 하지 않으셨다. ‘나를 사랑하느냐’ 묻지도 않으셨고 ‘내 양을 먹이라’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이것을 다 확인하셨다.
요한의 성품
사람의 성품이 다양하지만 크게 나누면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요한과 같은 성품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와 같은 성품이다. 주님의 돌봄과 손길이 더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베드로 같은 사람들이다. 요한에게는 물어보지 않으셨지만 베드로에게는 많이 물어보셨다. 요한에게는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볼 때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친구 같은 관계를 갖는 사람도 있다. 아브라함도 그런 사람이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아브라함 같이 하나님의 친구가 된 것이 아니었다. 모세도 하나님과 대면해서 친구처럼 말하는 사람이었다.요한 또한 주님과 굉장히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사랑을 받는 제자였다. 그 요한은 어떤 사람이기에 주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가.
첫째로 요한은 말수가 적다. 말이 많은 사람은 주님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이 빠르다. 언제나 말할 준비가 되어 있고, 말을 한다. 요한은 말수가 적은 대신, 들은 것을 가만히 깊이 생각하고 간직하는 사람이었다. 둘째로 요한은 속이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천성적으로 주님을 많이 닮았다. 어떤 사람이든 친구가 되려면 서로 편해야 한다. 요한은 온정이 많기 때문에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십자가상에서 육신의 어머니를 맡기셨다. 셋째로 내면을 중시한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14-17장까지 주님의 말씀을 가장 길게 나온다. 넷째, 계시록을 볼 때 요한은 하늘에 속한 것들을 관심하는 사람이었다. 땅에 대해서는 관심이 크지 않고, 거룩한 성이 장래 어떻게 아름답게 오는지 말해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로 가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베드로의 성품
요한처럼 깊이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주님을 열심히 따르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인데, 주님은 그런 사람은 또 그런 사람대로 사랑하시고 돌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장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젊을 때와 늙을 때를 구분해서 말씀해주신다. 젊은이들은 에너지가 넘치고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뜻대로 많은 일을 한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똑같다. 나의 지난날에도 이렇게 한 것이 많다. 나이가 먹을수록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이 줄어든다. 반면 젊은 사람들은 시행착오가 많다.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결국 베드로는 고난 속에서 순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주님이 예언하신 것이다. 그런 말을 듣는 베드로는 지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가장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순간이다. 성경에는 살았을 때보다 죽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에게는 주님이 그런 말을 안 해주신다. 안 해주셔도 될 사람에게는 안 해주신다. 그러나 말을 해야 할 사람에게는 하신다. 이것이 21장에 나타난 두 사람의 차이 같다.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니까 베드로는 ‘예, 따르겠습니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주님을 섬기면서 보건대, 생각이 활발하게 돌아가는 사람들은 꼭 말을 이렇게 한다.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1. 주님을 닮도록
첫째로는 우리가 죄 사함도 받고 영혼의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았고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주님을 닮도록’ 따라야 한다. 완전한 영혼의 순결, 그리고 주님의 온전한 성품을 닯아야 한다.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 그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된다. 우리도 온전한 성결에 이르게 된다.
2. 주님을 섬김으로
둘째는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봉사이다. 섬기는 일이다. 우리 각자는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 다 섬기는 길이 있다. 섬기는 영역을 주님이 할당해 주실 때, 온전히 섬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선교를 위해서 부르심 받았는가? 그렇다면 선교를 해야 한다. 그러나 다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 머물면서 작은 부분을 맡아서 섬기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3.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않음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너무 다른 것들, 다른 사람들을 관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을 잘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처럼 본인에게 맡겨진 것에 충실할 뿐,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게 관심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잘 따르지 못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에게는 물질적인 축복을 많이 주시는데, 나는 왜 안 주시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보지 말라. 따르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것을 따라서 섬기면 된다.
여러분도 거창한 어떤 것을 꿈꾸지 말고 그저 한두 가지 주님이 여러분께 맡기신 것을 신실하게 섬기기 바란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따르다 보면 베드로처럼 고난과 순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식으로 생을 마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님의 은혜가 모든 성도들 위에 항상 있기를 축원한다.
맺음말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의 비교
요한복음은 믿고 영생을 얻는 문제를 다루었고 마태복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다루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영생을 얻는 문제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다룬다. 그저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을 얻음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구분한다. 영생을 얻음은 멸망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살 수 있는 생명을 얻었음을 말하는 반면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마태복음에서 중점적으로 말하는바 행위와 관계가 있다. 요한복음은 다만 믿으면 영생을 얻으나 마태복음은 의로운 행실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영생은 영원한 것이지만, 천국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천국은 그치게 된다. 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표하며 그 시대를 천국 시대 또는 천년왕국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가 이 땅에서 실행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영생을 얻는 것과 매우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에 대하여 32회나 말했는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좋은 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영생과 전혀 다르다. 나는 요한복음을 다 읽은 여러분이 필자의 마태복음 강해를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면서 강해를 맺을까 한다. 모든 찬송과 찬미를 우리의 구속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며 영광이 영원히 그분께 돌아가기 원한다. 독자 여러분에게 진정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