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And again, Isaiah says, "The Root of Jesse will spring up, one who will arise to rule over the nations; the Gentiles will hope in him."
·And again : 또
·, Isaiah says : 이사야가 가로되
·, "The Root of Jesse will spring up : 이새의 뿌리가~~있으리니
·, one who will arise to rule over the nations; : 열방을 다스리는 이(예수 그리스도)가
·the Gentiles will hope in him." :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중요한 단어, 숙어
spring up 싹이 나다,자라다,뛰어 오르다,나타나다,일어나다.
arise 일어나다,나타나다,(문제,사건,곤란,기회등이) 일어나다, 발생하다,태양이 솟아 오르다.
rule over ~을 다스리다,통치하다,지배하다, 널리 행하다. hope 소망,희망,소망을 갖다.
바울은 이사야 11:1,10절을 또 인용하고 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런 말씀들로 미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비단 이스라엘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님이 명백하게 입증된다. 예컨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명절에 경배하러 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들도 섞여 있었고 그들이 빌립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하고 말한다. 빌립이 안드레에와 함께 이를 예수님께 고하자 주님께서는 “인자가 영광받을 시간이 왔도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고 말씀하신다 (요 12:20-23).
또 다른 예로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가나안 여인이 주님께 찾아와 병든 딸을 고쳐 달라고 부르짖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옳지 않도다” 고 하시면서 거절하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하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 가아난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서러기를 먹지 않느냐면서 비록 자기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지라 주님의 사역의 주 대상은 아닐지언정, 유대인 주변에서 부수적인 대상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주님께 간청하기를 계속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지어다” 하고 그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장면이 나온다(마 15:21-28).
이러한 사례를 보듯이 주님께서는 비록 “할례의 일꾼”으로 오셨지만, 그 사역의 시혜를 유대인에게만 엄격히 국한 시키지는 않았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시대별로 나우어 적용하는 세대를 구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인위적으로 구획을 딱 그어놓고 그 적용 한계를 제한 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다.
당신은 지구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선교사들 중 한 사람이었던 존 페튼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원주민들이 날만 새면 벌겨벗고 카니발을 즐기는 남태평양 뉴에버디 섬에 가서 복음을 전하던 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내를 잃고, 또 몇 년 지나지 않아 자녀들까지 모두 잃고, 또 그로부터 2년이 지나자 갖고 있던 성경마저 불에 태워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가 그 섬을 떠나 나왔을 때 그에게는 한 사람의 가족도 없는 홀홀 단신이었고 성경도 없는 빈손뿐이었다. 그런 그가 3년 뒤 그 섬으로 되돌아가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그 섬의 원주민들 중 성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섬에서는 더 이상 카니발 같은 이교도적 축제를 벌리지 않았고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으며 한 사람의 노예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섬 전체를 이처럼 변모시켜 놓았던 존 페톤이 굳게 붙잡고 있던 성경 구절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내게 구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이방을 네 유업으로, 땅의 맨 끝을 네 소유로 주리라” 는 시편 2:8말씀이었다.
이 구절은 세대적 경륜으로 구분하자면 천년왕국 시대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존 페튼은 이 구절을 내세워 주님께 약속을 지키라고 완강하게 기도로 요구했고,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한 섬 전체를 복음화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도록 해 주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8절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할례의 일꾼이 되셨으니” 이것은 할례의 백성 유대인의 조상,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고히 하시기 위함인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본적으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역자로 오셨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대부분이 교리적으로는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아주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대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유대인 민족 단위로 볼 때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유대인은 그분의 “산돌”이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결과 유대인은 매태복음 24장에서 언급되는 비극적인 사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 9절의 말씀처럼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부수적으로 사역하심으로써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런즉, 바울이 앞서 9절, 10절, 11절, 12절에서 인용했던 시편과 이사야의 구절들은 실제적, 교리적 관점에서는 천년왕국 시대 관련 구절들로서 재림하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 천년왕국 시대 동안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게 될 이방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말씀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할례의 일꾼”으로 지상에 초림하셨을 때 그 사역의 주 대상은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사역하셨듯이 바울이 천년왕국 시대에 관련되는 이들 구절들을 지금의 교회시대에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가령, 12절에서 “이새의 뿌리 곧 이방인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라고 한 이사야 11:1절의 인용구 역시 천년왕국 관련 구절이다. 그러나 이것이 천년왕국 관련 구절이라고 해서 “이방인들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한 말씀이 지금 교회시대에 실현되기를 바울이 추구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그가 이 말씀을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의 몸에 적용하여 인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극단주의 세대주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것을 잘못이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것은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오류가 아니라 구약을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구약에 적용하고, 천년왕국 관련 구절들을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천년왕국 시대에 적용하더라도, 영적인 측면에서는 얼마든지 교회시대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약의 교리적 적용과 영적 적용은 별개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시대에 성경을 설교하면서 구약은 손도 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리적으로는 구약이 그리스도의 몸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설교한다.
사무엘하 19:10절에 보면 “이제 어찌하여 너희는 왕을 모셔오는 일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아니하느냐?” 는 언급이 나온다. 이 시대에 많은 설교자들이 이 구절을 본문으로 하여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느냐?” 고 외친다.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느냐고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 너희 신학교들이요,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느냐?”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여,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느냐?”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느냐?”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여, 너는 어찌하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느냐?”
이 시대의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여, 너희는 통치자를 요구하면서 어찌하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느냐?” 성경대로 말하는 설교자들은 이렇게 외친다.
이들이 어째서 이 구절을 들먹거리는가?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나룻배를 타고 요단강을 건너오고 있는 다윗에 관한 언급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는 데 사용하고 있단 말인가?
설마 이들이 성경 말씀을 올바로 나누지 못한 탓이라고 우겨대지는 못하리라.
▶해석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