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김현승, 그리고 박두진
기독교 시인의 등장
얼마 전 어느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모든 통로에 그림과 사진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시가 있고 시인이 있고, 작가가 있고 작품이 있는 그런 문화와 함께하는 교회라면, 각박한 세상에 쉼과 여유를 주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는 예배 때 좋은 시가 낭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시적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 한국교회가 역사와 문화가 있는 넉넉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여러 종류의 문학 장르 중에서도 가장 함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시만큼 가을에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아름다운 시 한 편과 함께하는 가을이 된다면, 한국교회가 얼마나 넉넉하고 풍성해질 수 있을까?
한국 근대문학에 있어 시의 세계에 기독교적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부터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육당 최남선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천자문과 동시에 국문을 깨치고 접한 것이 주로 성경과 기독교 관련 서적이었던 것 같다. 최남선은 1890년 언더우드가 펴낸 <한영자전>을 기초로 1928년 <신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최남선에게 있어 기독교의 영향은 스스로의 재발견부터 그가 뜻하는 민족 개화라는 이상 표출에 이르기까지 더할 나위 없는 디딤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춘원 이광수도 1905년 일진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후, 명치학원 중학부에 다니면서부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문학 전 장르를 다루는 춘원에게 있어 기독교 사상은 소설에 다수 반영되었고, 시 작품에서도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내 죄에 눈이 띄어 / 소스라쳐 놀랐나이다 / 내 입으로 지은 죄는 바다와 같사옵고 / 몸으로 지은 죄는 산과 같사옵고 / 마음으로 지은 죄는 허공과 같이 끝간 데를 모르나이다
-‘내 죄’에서
이 작품은 제목처럼 하나님을 향한 내 죄의 고백이었다. 기독교 사상의 제1장이라 할 수 있는 철저한 회개가 그 주제로 설정되고 있다. 이후 1920년대에 들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토대로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작품을 썼던 전영택과, 민족주의적 이상주의를 실현해 나갔던 주요한, 그리고 1927년 <청춘> 65호에 ‘기도실’을 발표했던 장점심 등이 기독교 시의 맥을 이어왔다.
일제 탄압이 가열되는 시점인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시가 어떤 목적의식이나 피상적 표현 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성경에서 얻은 관념적 시어에서 벗어나, 좀 더 실제화된 신앙의 경지로, 나아가 기독 정신을 성숙한 신앙시로 육화시키기 시작한 때가 이 때쯤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국 근·현대에 있어 나름대로의 뚜렷한 개성과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맥을 이어온 기독교 시인 3인의 시 세계를 돌아봄으로써, 한국 기독교 시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면 한다.
부끄러움의 미학, 윤동주의 ‘서시’와 ‘십자가’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1937년 ‘카토릭 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3년 사상범으로 붙잡혀 1945년 형무소에서 죽은 이후인 1948년 1월, 유고시집 <하늘과 별과 시>가 나옴으로써 알려진 시인이다. 윤동주의 시는 유명하다. 어렵지 않고 길지도 않지만, 읽다 보면 마음 속에서 뭔가 조용한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의 시가 자신의 허물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에 대한 고백의 양식이라는 설명도 낯설지 않다.
윤동주는 자신의 허물을 고백함으로써 ‘부끄러움의 미학’이라는 독창성을 확립했다. 부끄러움의 미학이란, 그의 시가 나타내는 참회의 고백이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인식하고 고백한다는 점이다. 이런 시인은 드물다. 그래서 독보적이다.
윤동주 시 세계의 출발은 철저한 자아성찰에서 비롯되며, 그 결과는 곧 부끄러움을 낳게 된다. 이 부끄러움은 근원적으로 기독교적 신앙에서 여과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널리 애송되어 온 ‘서시’는 그러한 시의식에서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전문
이러한 시인의 삶을 보여주는 대표작이 서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그가 의도한 ‘하늘’은 막연한 자연의 하늘이 아니라, ‘창조주’의 관점이라는 기독교적 양면성을 지닌다. ‘하늘을 우러러’는 것은 성경의 여러 장면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이란 땅을 바라보던 눈을 하늘을 향하여 우러르는 행위이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맹세하였으나 현실적 자아는 늘 부족한 것이기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치 순결한 영혼의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하나님 앞에서’라는 ‘코람데오’, 즉 신전의식의 표현인 셈이다. 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사상으로, 기독교 신앙 최고의 고백이다.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도 그의 차별점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뇌가 탁월하게 표현된 윤동주의 작품으로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며 순교의 표식이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에서처럼 그는 암담한 시대를 향한 민족적 제물, 기독교적 순교의 결연한 선언을 하고 있다. 또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희생을 통한 구원의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결국 그는 암담한 시대의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를 지고 살아갔다. 이렇듯 시에 사용된 십자가는 기독교적 상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은 민족의 고통을 순교자적 희생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시인의 경지를 의미하는 개인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참회록’, ‘십자가’, ‘자화상’ 등 그의 시 세계는 자신에 대한 평가의 잣대를 주관적인 것에 두지 않았다. ‘하늘’로 상징되는 창조주의 뜻, 원수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놓은 ‘그리스도’의 삶을 기준으로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봤다.
기도하는 시인,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김현승은 1913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목사님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제주도와 광주 등지에서 지냈다. 미션 계열의 광주 숭일소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등에서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특히 영국 시인 브라우닝의 ‘파파의 노래’를 읽은 뒤 감동에 젖어 시를 습작하기 시작한다. 숭실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당시 교사로 있던 양주동, 이효석의 강의를 들으며 창작욕을 불태우고 습작에 몰두한다. 교지에 발표한 시들이 스승 양주동의 눈길을 끌어, 신춘문예나 잡지추천제도와 문단의 관행과 상관없이 1934년 동아일보 문예란에 발표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김현승은 기독교 시를 시 형식에서 벗어나 시의 새로운 틀 속에서 성공적으로 형상화시킨 대표적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기도를 시화한 대표적인 작품이 <옹호자의 노래>에 나오는 ‘가을의 기도’이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 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의 기도’에서
김현승의 시는 성경의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라는 신앙의 구도와 같은 문맥 속에서 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의 시어들은 깨끗하고 투명하며, 세련되고 지적인 언어를 구사하였다. 3연으로 된 이 시는 ‘기도하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호올로 있게 하소서’라는 간결하고도 분명한 기원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어 그 기원을 구체화하고 있다.
‘모국어’란 때 묻고 속화되지 않은 순수한 원형의 언어 곧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역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선 절대자의 은총이 필요하므로 오직 그분만을 택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궁핍하고 어두운 식민지 시대 고통받는 민족의 비애를, 낭만적인 자연 예찬과 인간의 탐구정신 속에 녹여내는 시들로 빚어냈다. 한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기도 했으나, 그는 교편생활과 더불어 시작(詩作)에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과도 교류하며 문단활동의 폭을 넓혀간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광주에서 <신문학>을 창간, 이듬해 4월에는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명된다. 당시 네 살 된 병든 아들을 전쟁의 빈곤과 가난 때문에 제대로 약도 못 쓰고 잃는 비극으로 인해 애통함으로 완성된 시가 ‘눈물’이다.
더러는 / 옥토(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도 / 금자기 않은 / 나의 전체는 오직 이 뿐! / 더욱 값진 것으로 / 드리라 하올 제 /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눈물’에서
그는 50대로 접어들면서 종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신과 인간 사이의 회의를 ‘고독’이라는 공간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고독의 문제가 심화되기 시작한다.
무덤에 잠깐 들렸다가 / 내게 숨 막혀 / 바람도 따르지 않는 /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 내가 한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버린다
-‘고독의 끝’에서
고통의 시간, 죽음의 끝에서 ‘영혼의 옷’을 벗고 만난 것은 바로 고독이었다. 고독의 정점에서 그는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다. 불투명하던 영적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고독이라는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김현승은 인간적인 고독 속에서 끝내는 그것을 극복하고 절대구원으로의 회귀하였던 것이다.
김현승의 ‘눈물’, ‘가을의 기도’, ‘절대 고독’, ‘절대 신앙’, ‘부활절에’, ‘희망’ 등 그의 시는 서구 기독교의 오랜 전통인 청결한 윤리의식과 한국의 지조와 절개를 중히 여기는 선비정신이 혼합돼 독특한 정신주의를 구현한다.
신과 함께 역사 속으로, 박두진의 <오도(午禱)>와 <사도행전>
박두진은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여 1940년 ‘문장’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자연에 대한 시를 주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 후부터 기독교적인 확고한 신념과 함께, 점차 역사현실에 대한 참여자로서의 자리를 다져잡기 시작한다. 특히 6·25 당시 피난지인 대구에서 쓴 작품들로 이루어진 제2시집 <오도(午禱)>를 전환점으로 역사현실에 한 발 다가선다.
타오르는 묵을 추겨 물을 주시고 / 피 흘린 상처마다 만져 주시고 / 기진한 숨을 다시 / 불어 넣어 주시는 /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주/ 당신은 나의 생명 당신은 나의 모두… / 뙤약볕에 기진한 / 나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오도’ 중에서
‘오도(午禱)’는 글자 그대로 대낮의 기도인 바, 이는 숨어서 사적인 소망을 아뢰는 기도와 달리 시대적·민족적 고뇌를 정면에서 온몸으로 진액을 짜내듯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나약함을 고백하며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칠 때, 그분은 타는 목을 축여주시고 상처를 싸매 주신다. 이처럼 그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 민족, 인류의 구원을 위한 포즈는 이후에도 박두진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시집 <거미와 성좌>를 발표하고, 지성인으로서의 신념 때문에 문초와 감금을 당하기까지 한다. 이후 신앙적으로 성숙되면서도 더 힘찬 시어를 사용한 것이 <사도행전>이다.
깃발을 내려서는 안 되리/ 창들이 찔러오고 / 조롱들 덮쳐오고 / 절망을 패배를 분노를 딛고 섰던 / 당신의 골고다의 / 뜨거운 깃폭 / 깃발을 내려서는 안 되리 / 이미 올려졌던 우리들의 깃폭 / 이미 내리워진 우리들의 / 깃폭을 / 바람이 불어와도 치올리고 / 짐승떼 몰려오도 치올리고 / 하늘땅 뒤바뀌어도 치올려 / 덧덮여 짓눌리는 오늘의 어둠 / 어둠의 그 중심에 / 기 다시 꽂아 / 깃발을 내려서는 안 되리 / 불을 지르면서 가야하리 / 노래를 부르면서 불을 지르고 / 눈물을 견디면서 불을 지르고 / 벌판에 혼자일 땐 스스로에 / 군중 속에 혼자일 땐 그 속에 / 불을 질러 / 어디나 덧쌓이는 우리들의 어둠 / 갇혀서 뒤착이는 열한 침묵에 / 불을 지르면서 가야하리
-‘사도행전 12’ 중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처럼, 사도적 결의로 희생을 감내하며 몸으로 실천하려는 불퇴전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나 여기에 있나이다’, ‘갈보리의 노래’, ‘지성산’, ‘뜨거운 상처’, ‘할렐루야’ 등 그의 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회적·역사적 장애에 굴하지 않고 맞섬으로써 한국 기독교 시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했다.
3인의 시인: 윤동주, 김현승, 그리고 박두진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통한 신앙적 자기구원과 암담한 시대 속 역사구원이 맞닿는 지점에서, 모두를 대신하여 28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를 지고 갔다. 기독교적이지 않은 듯하면서도 가장 기독교적인 시어를 구사한 것이다. 이는 곧 은유와 상징을 가장 적절히 사용함으로 대표적 기독교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현승은 기도를 시의 세계로 이끌어 가장 탁월하게 승화시킨 시인이다. 그는 절대자 하나님 앞에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고뇌를 잘 닦인 언어로 승화시켰고, 이는 기독교 시의 새로운 영역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박두진은 민족 수난기에 역사의 한복판에서 기독교라는 한정된 테두리를 정하지 않고, 삶 자체를 신앙으로 몸소 체감하며 살았던 시인이다.
이렇게 한국 근·현대문학에 있어 3인의 대표 기독교 시인들이 기독교적 시 세계의 흐름을 이어왔던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 시인이라는 공통분모 외에 각자의 다른 색깔을 보고, 향후 우리 기독교 문학과 시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고,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뿌리내려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들은 각기 시대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기초한 시의 이미지 형상화 등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신앙고백으로서의 작품 활동은 한국 기독교 문학과 시의 다양성과 영역 확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더불어 한국교회의 풍성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윤동주를 찾고 제2의 김현승과 박두진이 나오는 ‘문화 교회’로 가야 한다.
/이효상 원장(교회건강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