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연합운동과 복음주의(1)
한기총 이영훈 목사의 제20대 대표회장 취임과 한목협의 ‘교단장협의회’ 재발족 움직임으로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변화의 조짐이 싹트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본지는 2014년 3월 20일, 한기총에서 주최한 한국교회연합운동 토론회에서 박명수 교수(서울신대)가 발표한 ‘복음주의적 연합운동 방안’ 원고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기초: 복음주의
최근 한국교회 연합운동은 근본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은 진보주의로 대표되는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보수·복음주의를 대표하는 한기총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NCCK는 계속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는 한편, 보수·복음주의는 사분오열하고 있다. 한기총에서 한교연이 나왔고, 최근 다시 보수적 교단의 연합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보수·복음주의 교회의 본격적 분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현재 한국 보수·복음주의는 부패와 분열을 다 갖고 멸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복음주의에 기초해서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 대다수가 복음주의적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대부분은 급진적 진보주의도, 극단적 보수주의도 아닌 ‘온건한 복음주의’이다. 여기서 복음주의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며, 선교를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는 신앙의 형태를 말한다.
우선 필자는 한국교회가 진보주의로 통합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진보주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갖고 있으며, 구원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고, 교회를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이는 한국교회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단체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교회 일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지,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NCCK를 중심으로 나오는 수많은 성명은 많은 부분에서 대다수 한국교회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보수주의로도 연합되기 힘들다. 한국교회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것은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칼빈 보수주의’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교리를 절대적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칼빈주의와 기독교를 동일시한다. 칼빈주의가 기독교의 여러 형태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보다, 칼빈주의야말로 모든 기독교를 판단하는 잣대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세는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을 수 없다.
필자는 한국교회는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한국 기독교 복음주의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보수주의부터 진보주의까지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는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다 같이 참여하고 있고,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는 장로교 통합 측부터 고신 측까지 참여하고 있다. 사실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루터주의, 칼빈주의, 웨슬리안, 오순절운동 등을 다 포함한다. 원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복음주의는 진보주의와 싸우기 위해 보수주의자들과 연대해 활동해 왔다. 따라서 복음주의 안에는 보수주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전제를 갖고,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우선 복음주의 관점에서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역사를 설명하고, 이어 복음주의 연합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언급하려고 한다.
한국교회 복음주의 연합운동의 역사
우선 한국교회는 복음주의자들의 선교로 시작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교리만 강조하는 정통주의자들도 아니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로 대표되는 초기 선교사들은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난 일이,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모인 가운데 1905년 재한복음주의선교사연합공의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들은 칼빈주의든 알미니안주의든 간에 하나의 예수교회를 만들려 했다. 이는 한국교회의 뿌리가 복음주의임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 단체는 당시 일고 있던 부흥의 열기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들은 전국적인 부흥회를 열기로 했고, 이 결의에 의해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사실 복음주의 연합운동의 기초는 복음을 전해 참된 신자를 만드는 데 있었다. 그 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되어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모체가 되었고, 여기에 1930년대 중반부터는 성결교회와 구세군도 가담하여 보다 넓은 의미의 연합기관이 되었다.
일제시대 한국교회에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공산주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공산주의는 한국에 들어와 한국 기독교를 공격했다. 이들은 기독교가 현실 사회를 무시하는 아편과 같은 종교라 비판하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여기에 대해 1932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한편으로 기독교의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의 계급투쟁, 유물사상, 폭력적 혁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를 통해 한국기독교는 반공의 입장에 서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일제시대 연합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건국과 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당시 한국사회는 좌우 이념대립이 심했고, 여기서 한국기독교협의회는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이승만, 김구 같은 우익 지도자들과 힘을 합쳤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우익지도자들과 함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이 모임을 중심으로 6·25 때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연합회가 1948년 설립된 WCC와 연결되면서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주류 교단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한국교회를 WCC에 가입시키려 했고, NCC를 그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당시 WCC는 소련이 제3세계 기독교와 함께 서방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통로로 삼고 있었고, 신학적으로 영혼구원보다는 사회정의 실현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교회의 주류인 복음주의와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에 들어온 것이 NAE와 ICCC였다. NAE는 온건한 복음주의 입장에서, ICCC는 극단적 근본주의 입장에서 WCC의 흐름에 저항했다. 하지만 온건한 입장을 가진 NAE는 자신들이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는 것을 보고 한국에서 철수해 버렸고, 그 결과 한국교회는 진보적인 NCC와 근본주의적인 ICCC가 남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이끌어 간 분이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온건한 복음주의였다. 이들은 1960년대에는 민족복음화운동, 1970년대에는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와 엑스플로 74등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부흥을 이끌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당시 한국교회 대표는 NCC도 ICCC도 아닌,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한 복음주의였다. 이들의 특징은 분명한 반공의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온건한 복음주의였다.
이들은 교리적 차이보다는 연합의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교회가 가장 큰 부흥을 경험한 것은 어떤 연합기구도 아닌,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계속>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