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의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98)-부활신앙(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 15:20, 23)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세계 어느 종교도 부활을 중심으로 삼는 종교는 없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들은 가장 불쌍한 자가 된다(고전 15:19).
부활은 일시적 소생과 대비되는, 영원한 생명이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소생한 여러 사람들이 있다. 엘리사가 소생시킨, 수넴 여인의 아들이나, 예수께서 소생시킨,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그 예이다. 이들이 비록 죽음에서 소생은 되었지만 다시 죽어 무덤에 묻힌 자들이다. 그들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소생하여 얼마의 기간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성경은 죽음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에서 온 것이라고 가르친다. 구약은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죄 문제 해결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은 죄에 대한 일시적 해결을 위한 것이지, 영구적 해결 방법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죗값을 대신 지불해주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 그 자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죗값을 영원히 대신 지불하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고, 그의 부활은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영원한 생명의 위대한 승리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가 지은 죗값을 지불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함이다(롬 4:25). 여기에서 ‘의롭게 하기 위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시스’는, 올바르다고 선언하는 사법적 판결을 의미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역시 사법적으로 올바르다고 최종 판결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죗값으로 발효된 해방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난 것이다(롬 6:11).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한다(고전 15:20, 23).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의 또 다른 열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이 땅에서도, 우리들은 다시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순간마다 경험하고 있다.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들은 거듭난 중생의 삶을 살고 있을 뿐 아니라,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매일매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참 생명의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종말의 때에 우리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생명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을 믿는다. 그러나 지금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들을 의로운 길로 이끌어가는 삶의 실제적 원동력이 되어 주신다. 그분은 역사의 종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소극적인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지금의 우리들에게로 다가오셔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며 역사를 섭리하시는, 온 우주의 주인이시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