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칼럼] 고슴도치의 딜레마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최고의 명문대를 나온 남성이 있었다. 고시에 합격해 정부 고위 관리직에서 근무하고 있다.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가족도 팽개치고 정신없이 분주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소위 성공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렇기에 늘 당당하고 자부심이 넘쳤다.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평소에 별로 가까이 하지도 않던 친구에게 찾아갔다. 풀이 다 죽어서 말했다.

“난, 자네가 정말 부럽네.”
“그게 무슨 말인가?”
“난, 여태까지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어. 난 인생을 잘못 살았어.”
“이 친구가 왜 이러나?”

알고 보니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어느 날 딸이 가출하고 말았다. 화가 난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집안에서 뭐했냐? 먹고 놀면서 자식교육 하나 제대로 못시키냐.”
“그럼, 당신은 한 게 뭔데? 돈 벌어준 것 외에 자식을 위해 해준 게 있어?”

결국 이들 부부는 가출한 딸 때문에 대판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이혼 위기까지 치닫게 되었다. 이쯤 되니 인생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와서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게다.

남편과 아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아들과 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이다. 이들은 서로 가족이라는 둥지를 틀고 함께 행복을 만들어 간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상대방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아픔과 상처를 준다.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존재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한자로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이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서로 기대며 살 수밖에 없다.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해 주고 도와주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름답다.

그런데 정작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고슴도치 인생과 같다고나 할까. 고슴도치는 몸에 가시를 갖고 있다. 물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인 셈이다. 적이 공격하면 자신의 몸을 밤송이처럼 말아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한다. 그런데 추운 겨울에는 그 가시 때문에 딜레마에 빠진다.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서로 몸을 밀착시킬 수가 없다. 떨어져 있자니 춥고, 체온을 따뜻하게 하자니 상대방의 몸에 있는 가시에 찔린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도치의 딜레마’라고 말한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한 달 남은 12월의 진입로.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비온 후 쌀쌀해진 날씨에 드리운 하늘은 무척 맑고 아름다웠다. 하나 둘씩 박힌 별들을 바라보며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리곤 혼자 말로 속삭여 본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호흡할 수 있다는 걸. 이렇게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걸. 집으로 들어가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내 곁에 있다는 걸.” 그리고 다짐해 본다. 오늘도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산소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산소 같은 존재. 한 시도 없으면 안 되는 존재. 생동감을 더해줄 수 있는 존재.

한 해를 돌아보면서 관계를 한 번 점검해 본다.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았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지겨운 존재’는 아니었는지. ‘그저 그런 사람’이었을까? ‘꼭 필요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남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일치하기는 할까?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에 도취되어 남이 생각하는 내 모습을 까맣게 모르고 사는 건 아닌지.

유대인들은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한다고 한다. 첫째는 ‘병’과 같은 사람이다. 질병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을 만나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가능하면 멀리 피해야 하는 존재이다.

둘째는 ‘약’과 같은 사람이다. 약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 때나 함부로 먹지는 않는다. 평소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가 어떤 일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잘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어느 땐가 아주 유용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밥’과 같은 사람이다. 밥은 매일 매일 섭취한다. 밥을 먹지 않고는 기운을 차릴 수 없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만날 때마다 힘이 되고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주 만나면 좋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고든 맥도날드는 ‘같이 있어서 기쁨을 주는 사람들’과 ‘떠나는 것이 기쁨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함께 있으면 힘이 되고, 마음이 통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가시를 갖고 있어서 함께 있으면 자꾸 찔리게 되는 사람도 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다.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젊은 후배 목회자에게 해 주고 싶은 목회적인 권면이 있기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인생의 황혼녘에 이런저런 가슴에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기에.

그 편지에서 ‘버린 사람들’과 ‘찾아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버린 사람은 누군가?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말한다. 바울은 당시 소아시아를 매우 사랑했다. 그가 사역했던 핵심 무대가 바로 지금의 터키 지역이다. 심혈을 기울였고,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 오죽했으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표현했을까? 바울을 배신하고 등을 돌리는데 주동적 인물이 바로 ‘부겔로와 허모게네’이다. 바울은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게 했던 사람,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겨 준 사람이기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는 그때 한 사람, 예외적인 인물이 있었다. 바로 오네시보로이다.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집을 제공해 주고, 많은 편리를 봐 주었던 사람이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자주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너무 힘들고, 외롭고, 낙심될 때 그의 곁을 지켜주던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도저히 그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가족을 축복하고 자랑한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딤후 1:18)

내 이름은 어느 명단에 들어있을까? 버린 사람? 찾아 준 사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얄미운 사람? 고마운 사람? 사람들은 나를 볼 때 어떻게 할까? 축복? 저주? 한 번쯤 정리해 봄직하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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