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분간의 혈투가 끝난 뒤 땀방울로 얼룩진 그라운드에 엎드려 흐느끼던 선수,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글썽이던 선수. 그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감추어야 했다. 순간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난 그들에게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그대들은 대견했다고, 그대들은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혀 아쉬움으로 그대들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고.
이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배우자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이, 자식으로 인해 속앓이하고 있는 이, 실직과 사업 실패로 코가 석 자나 빠져 있는 이. 인생의 그라운드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대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각박한 세상에서 얼마나 고달프냐고.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쉴 새 없이 달리고 뛰어야 하는 그대들. ‘한 박자 쉬어 가자’고 권하고 싶다. 그래도 인생이 망가지는 건 아니니까.
2015년 1월 31일. 호주 시드니의 스타디움은 뜨거웠다. 2015년 호주 아시안컵 결승전인 한국과 호주의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한국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린 호주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1988년 카타르 대회 이후 27년 만의 결승 진출이라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끓어오르는 욕망은 그게 다는 아니었다. 1960년 이후 55년 만에 아시아 챔피언의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개최국 호주에게 1대 2로 패하고 말았다.
인생은 그렇다. 승리에 대한 그치지 않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 원하는 걸 다 이루고 사는 이는 없으니까. 가다 보면 실패도 한다. 좌절과 절망의 쓴 잔도 마셔야 한다. 그러나 낙방과 패배마저 인생의 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 깨닫고, 배우고, 성장한다. 실패를 인생의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삼을 줄 아는 지혜만 갖고 있으면 된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은 호주의 홈그라운드의 열기 속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역량과 기력을 다 쏟아 부었다. 최고의 성적인 아니지만 우리는 만족할 수 있다. 그대들은 뼈가 부서져라 혼신의 불을 태웠으니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이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서 싸운 것을. 그렇기에 최고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뜨거운 응원과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대들은 결과보다 더 소중한 과정에 충실했으니까.
세상은 자꾸 결과지상주의로 흘러간다. 그러니 과정은 무시한다. 과정을 무시하니 세상은 자꾸 불합리하고 어지럽게 흘러간다. 돈을 거머쥘 수 있다면 배우자나 부모마저도 살해할 수 있는 세상. 일등을 할 수 있다면 부정도 용인되는 세상.
그런데 월드컵 전사들은 멋진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우승은 아니어도 ‘원팀’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대들의 하나로 어우러짐은 감동이었지 않은가? 과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이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성세대들은 다음 시대들에게 결과보다 과정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점점 악의 소굴로 변질되고 만다.
월드컵 전사들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초기의 어수선한 전력과 조직력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놀랍게 가다듬어졌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끈끈한 응집력을 더해갔다. 그들의 투혼은 점점 더 강해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강한 정신력을 만들어 갔다.
감독이 던졌던 일침, ‘우리는 더 이상 우승을 바라보는 팀이 될 수 없다’는 말에 선수들은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자극제로 받았다. 감독은 충격요법을 사용한 게다. 결코 포기를 안겨주기 위한 독설이 아니었다. 이를 악문 도전을 끌어내기 위한 세심한 전략이었다. 태극전사들은 그 이후의 경기를 통해 그것을 증명시켜 주었다.
태극전사들은 5경기 무실점 행진을 감행해 나갔다. 후반 추가 시간 1분에 뽑아 낸 손흥민 선수의 만회골은 심장을 터지게 할 만큼, 통쾌함을 넘어 감동 그 자체였다. 우승에 대한 강한 갈증을 보여준 골이었다.
인생은 처음부터 완전한 출발이 없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아무리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을지라도 완벽한 인생은 없다. 중요한 건 끊임없는 성장이다. 성장과 발전을 향한 꾸준한 노력이 아름다운 결실을 만들어 낸다. 화려한 출발보다 더 아름다운 건, 화려한 마무리이다. 아니 화려한 마무리가 안 되면 어떤가? 최선을 다해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면 족하지 않은가? 처음보다 발전하고 성장한 그대의 모습에 족하지 않은가?
슈틸리케 호의 출발은 불안했다. 기대주들이던 이동국, 김신욱, 박주영 같은 원톱 스트라이커들이 이러저런 이유로 함께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청용, 구자철이라는 코어(core) 맨들이 조별리그를 치르며 부상으로 조기에 아웃당했다. 뭔가 설익은 감자처럼 100% 전력을 꾸리지 못했다. 게다가 대회 초반 주전 다수가 감기 몸살 증상을 보였다. 감독도 이제 막 부임한 지 4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불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대들은 해냈다.
인생은 불안의 연속이다. 그런데 아는가? 불편함이 다 절망은 아니다. 미숙함이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불안을 안정으로 끌어올리는 용기와 기술이 필요하다. 불편함을 넘어 안정으로 나아가면 된다.
태극전사들은 실망의 늪을 지나 희망의 문을 여는 비결을 가르쳐 주었다. 포기하지 않는 열정. 서로를 향한 뜨거운 격려와 지지. 헤드를 중심한 멤버들의 끈끈한 뭉침. 컨트럴 타워의 유연한 작동. 기성용 선수가 했던 말이 있지 않은가?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100%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한 우리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에게 마지막까지 무릎 꿇지 않는 투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안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인생을 만지고 회복시켜 주셨다.
불안한 한국사회 앞에 서 있는 한국교회 역시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복음을 통한 회복을 가져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불안한 한국사회를 회복시킬 수 없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중 하나는 원톱 역할을 했던 이정협 선수다. 그는 K리그 팬들에게조차 생소한 선수다. 그런데 슈틸리케 감독은 이 선수를 등용하기 위해 5차례나 상무 경기를 찾아가서 지켜보았다. 이동국, 김신욱, 박주영 같은 기존의 원톱 부재 속에 발탁한 이정협이 진흙 속에 감추어진 진주가 될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아시안 컵에서 2골이나 넣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인맥과 지연, 관피아로 얼룩진 한국사회의 쓴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는 절박성을 보여주었다. 좋은 선수를 발탁하기 위한 감독의 노력이 결국 멋진 보배를 길러낸 것이다. 예전에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을 발굴한 것처럼.
늦었지만, 우리 사회도 빨리 이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불안한 베드로에게서 ‘반석’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한 사람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지기반이 없어도 건강한 사회 자체에 대한 신뢰를 갖고 그저 열심히 일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끈’을 끊어버리는 것과, 성역이 없는 인재 발굴의 노력이 없이는 젊은이들은 절망과 포기만 경험해야 할 게다.
이제 우리는 간다. 6월부터 시작되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향해.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도전을 향해. 지금보다 더 잘 다듬어진 팀으로 발돋움해서 세계를 누비는 태극전사들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마지막까지 투혼을 불살라 최선을 다한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정말 장하고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