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을 찾은 집사님이 있다. 얼굴과 눈에 황달이 심했다. 몸이 여기저기 가렵다. 병원을 가서 정밀 검사를 했다. 어려운 검사 끝에 내린 결론은 담도암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더 커졌다. 위로 간도 손상되고, 아래로 십이지장도 전이되었을 수 있다는 게다. 수술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한다. 중환자실에 있는 상태에서 심방을 가니 낙심되어 코가 석 자나 빠져 있다. ‘목사님, 수술도 불가능할 수 있대요. 다 끝났어요.’
나는 집사님에게 말했다. “집사님,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잖아요. 함부로 단정짓지는 말고요. 설혹 최악의 상황이어도 하나님이 하시면 우리는 몰라요.” “맞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집사님, 이번 기회에 집사님을 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집사님은 너무 분주하게 살아왔어요. 그렇게 분주하게 사느라 너무 많은 걸 잃었어요. 가족의 사랑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잖아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믿음을 잃었어요.” “맞아요, 목사님. 두 아들의 앞날을 생각하다 보니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이게 뭔가 싶네요.”
집사님이 간 병원에서 수술이 어렵다고 해, 지인을 통해 신촌세브란스병원에 갔다. 급기야 수술에 들어갔다. 열 몇 시간을 수술해야 한단다. 아침 9시경 수술을 들어가서 저녁 10시에서 12시쯤 끝날 수가 있단다. 그런데 너무 일찍 끝나면 위험하단다. 그건 수술을 포기했다는 말이니까.
오전 11시 20분경 수술에 들어간다고 문자가 왔다. 생각보다 늦게 들어갔다. 그런데 오후 2시 15분쯤 수술 포기라는 문자가 왔다. 너무 맘이 아팠다. 많이 낙심되어 있을 것 같아 다음 날 달려갔다. 임파선까지 전이가 되었다고 한다. 장기 일부를 절제하기는 했지만, 방사선 치료를 하고 항암 치료를 한 후에 다시 수술하기로 했단다. 지금도 집사님을 생각하며 기도한다.
데살로니가교회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마음 아파하는 성도들이 있었다. 더구나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신학적인 갈등도 존재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자는 것에 불과하다고. 자는 건 깨는 걸 전제한다. 깰 건데 낙심할 건 없다. 그렇게 슬퍼할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언젠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님처럼 무덤을 헤치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다. 무덤에서 영원히 잠자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신령한 몸을 입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공중으로 끌어올려져 죽은 자들과 함께 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은 자들을 가리켜 ‘죽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을 향해 ‘죽는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잠자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 준비해 놓고 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고 다시 와서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곳으로 데려가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사 갈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영원한 세계가 보장되지 않은 사람이나 두렵고 무서운 게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갈 것이다.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불안에 떨 건가?
무디가 하는 말을 들어 보라. “아마 여러분은 신문에서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언젠가 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절대 믿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높은 곳에서 살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이 흙으로 된 몸을 벗어나서 사망이 접하지 못하고 더럽히지 못하는 신령한 몸을 입을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거기 살아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은 지금 보혜사 영으로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내 안에 계신 성령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뻐할 수 있다. 세상 것으로 채울 수 없는 만족이 성령 안에서 경험된다. 그것으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드러내야 한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 선교와 봉사를 하러 간 샘물교회 교우 일행 중 탈레반에게 피랍 억류된 배형규 목사는, 머리와 가슴, 배 등에 10발 총기가 난사되어 처참하게 죽었다. 그때 아흔이 다 되신 큰이모가 계셨다. 그 이모는 배 목사를 자식 이상으로 사랑했다. 그러니 이모에게 배 목사가 먼저 천국에 갔다는 사실을 차마 말씀 드릴 수가 없었다. 혹시 쇼크라도 받으면 어떻게 할 건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배 목사가 천국으로 간 사실을 모르고, 큰이모는 계속해서 살려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게다. 결국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충격을 받기는커녕,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것도 10번 씩이나. 이건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게다. 이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재미있는 글이 있다. 걱정을 할 거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걱정하지 마라. 아프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낫는 병인가? 안 낫는 병인가? 낫는 병이면, 걱정하지 마라. 안 낫는 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죽는 병인가? 안 죽는 병인가? 안 죽는 병이면, 걱정하지 마라. 죽는 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천국에 갈 것 같은가? 지옥에 갈 것 같은가? 천국에 갈 것 같으면, 걱정하지 마라. 지옥에 갈 것 같으면…, 지옥 갈 사람이 무슨 걱정이냐?
쓸데없이 이런저런 걱정하지 말자.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실 것이다. 그러니 죽은 자들을 향해 죽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죽을 지경이 되었을지라도 함부로 죽는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비해 놓으신 천국을 상속받을, 하나님의 상속자이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약속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