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학교교육을 부러워했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매년 한국의 어린이들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1개월이나 적다.” “한국 학생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여기 미국에서 할 수 있다.”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게 하는 일이 분명하다. 산업사회가 되다 보니, 대학을 보내야 하다 보니, 가정보다 학교나 학원에 잡아 두어야 하는 시간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과연 부러워할 일인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려면 노는 시간을 좀 더 확보해 주어야 하는 건 아닌지? 가정에서 부모와 함께할 시간을 좀 더 늘려야 하는 건 아닌지? 지난번에 10대 소녀가 쓴 동시 ‘학원 가기 싫은 날’은,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한국 교육의 허상을 보여주었다.
지난 토요일 교역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가고 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 몇 명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X친년’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초등학생들이었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자기네들끼리 하는 말이었지만,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스승의날을 앞둔 12일 구미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서글픈 일이 벌어졌다. 첫 수업이 시작되는 벨이 울려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도 한 학생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당연히 선생님이 한마디 했을 거다. 그러자 학생이 철제 의자를 집어 던지고, 선생님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것도 두 차례나, 여선생님을. 결국 선생님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징계위원회가 열리겠지? 그러나 교사는 학생을 처벌할 의사가 없다고 진술했다.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교사들의 명퇴 신청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교사가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도대체 왜? 교권 추락으로 인해 교사의 자부심과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연금법 개정에 따른 미래 불안 등의 요소도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건 스승으로서 정체성 문제일 게다.
성공주의와 경쟁을 부추긴 학교교육의 폐해는 이제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성적 지상주의를 추구하던 입시 위주의 교육, 자기 자녀를 천재로 기르기 위해 영재교육을 한다지만, 결과는 삭막한 아이들로 변질시켜 놓은 것이다.
머리는 커졌다. 그러나 가슴이 싸늘하다. 부분적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지혜는 잃었다. 개인주의의 늪 때문에 공동체 의식과 지체 의식은 다 사라지고 말았다. ‘I 의식’이 ‘We 의식’을 다 잡아먹고 말았다. 이렇게 가다가는 머지 않아 공동체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래도 교육의 희망은 교사일 게다. 교사가 사명감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해야 한다. 교사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을 맡길 수 있다. 교사가 일어서지 않고는, 교사를 일으키지 않고는 교육에 희망을 걸 수 없다.
교사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한때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라고 있었다. 그 지존파의 대부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때의 일이다.
그는 17년 전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 선생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걸 알면서도 너는 왜 크레용을 가져오지 않았어? 왜 번번이 안 가져오는 거야? 정신을 어디 두고 사는 거야.”
아무리 나무라도 그는 말이 없었다. ‘너무 가난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가져 왔습니다.’ 자존심이 상해 차마 이 말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그가 반항하는 것으로 생각해 그를 노려보면서 마구 때렸다. 때리면서 이런 말도 했다. “이 녀석아, 훔쳐서라도 가져와야 될 것 아니야! 준비물을 왜 안 가져와?”
그때부터 이 아이는 빗나갔다. 그래서 그는 사형장에서 최후 진술을 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내 일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부터 훔쳤습니다. 도둑질을 배우고 즐겼습니다. 오늘의 내 운명이 이렇게 됐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심히 내뱉는 한마디가 그 아이를 망치게 할 수도, 사회악으로 자라게 할 수도 있다. 이렇듯 교사나 부모의 말 한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
학교교육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교사를 살려야 한다. 교사 스스로가 살아나야 한다. 사명감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공교육에 빛이 들어오게 된다.
무너지는 공교육의 현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한다. ‘대안은 가정교육과 교회교육밖에 없다’고. 그러나 가정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맞벌이를 하지 않고는 자녀교육을 책임질 수 없다. 노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부부가 함께 산업전선에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시설에 위탁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시설이 좋아진다 할지라도 가정에서 부모의 손에서 자란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지식 중심의 교육, 성공지향적인 교육, 입시 위주의 교육 체제로서는 결코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 대학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출세지향적인 지식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성과 성품을 길러주는 교육체계로 바뀌어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 분위기.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일한 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 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중심의 교육 체질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걸 누가 할 건가? 정부와 공기관에서 정책적으로 입안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부모들의 정신과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달라질 게 없다.
그럼, 교회는 성장 세대를 책임질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요즘 다양한 변인으로 말미암아 교회교육은 무너지고 있다. 더구나 주일학교가 있어도, 예전처럼 사명감에 불타는 교역자나 교사가 드물다.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기도하고 함께 뛰노는 스승이 드물다는 것이다.
교사는 있지만, 변화를 일으키는 영향력 있는 스승이 드물다. 사명감으로 감동을 주는 스승이 드물다. 한 시간 가르치는 학원강사형 교사로서는 승부수를 띌 수가 없다.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교사가 필요하다. 늘 학생들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항상 기쁨으로 간구하는 스승이 필요하다(빌 1:3-4). 공과 지도 강사가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학생들을 내 자식처럼 돌아보는 교사가 필요한 게다(살전 2:7, 11).
사실 교회 교사를 ‘무명 용사’에 비유한다.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한다. 정말 뜨거운 존경과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대들이 일어나야 한다. 그대들이 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 사실 교회 교사는 목회자 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존재’라고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온 교회가 협력하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 다음 세대 전도를 위해 장년 교우들이 협력해야 한다. 그래도 무너지는 교회학교를 일으키는 건 단순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