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본 사연이다. 지난 금요일 tvN 채널에서 <렛미인5>가 방영되었다. 그 프로그램에 ‘아빠에게 미움받는 딸’ 서지은 씨의 사연이 소개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서지은 씨는 심각한 부정교합 때문에 안면비대칭으로 고통받으며 살고 있다. 턱이 좌우로 틀어져 있어 치아가 맞물리지 않는다. 그러니 음식물을 제대로 씹을 수도 없었다. 늘 소화제를 달고 다녀야 했다. 어깨도 한쪽으로 축 처져 있어서 남들이 보기에 흉측하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 3살 때부터 몸에 이상증세가 왔다. 사람들은 이상해진 자신을 보며 장애인이라 놀려댔다. “너 같은 건 살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핀잔을 주었다. 그가 아파하는 건 얼굴 자체보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가족들은 위로자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아버지마저 딸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짓밟아 버렸다.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니 집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상과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하루종일 집안에만 처박혀 있는 딸을 보며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얼굴이 그러면 행동이라도 똑바로 해야지!” 심지어 딸에게 손찌검까지 해댔다. 결국 수치와 분노를 참지 못한 그녀는 맨발로 집을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딸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할 아빠의 폭력적인 언행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아빠에게 핀잔을 당하고 괴로워하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는 눈망울이 맺힌다. “딸이 아빠에게 미움 받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불쌍하다.”
그에게 물어봤다. “평소 아빠는 어떤 존재냐?” 딸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아빠는 악마 같다.” 그녀는 생각한다. “난 왜 태어났을까?” 이렇게 처량한 지경이 된 인생을 바라보며 스스로 말한다. “세상이 두려워 피하던 끝에 점점 혼자가 됐다.”
자신에게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 드러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늘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부위이다 보니 얼마나 힘든지. 사람들이 손가락질 안 해도 그 자체로도 괴로운 일이건만, 사람들이 쏘아대는 따가운 눈초리는 방사선 물질보다 더 가혹하게 느껴진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다고 해도 아버지가 던지는 냉소와 폭언은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세상을 왜 태어났으며, 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신! 눈물과 탄식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일 수 없는 처량하고 가련한 인생이여!
그대에게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주님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물론 그렇다손 치더라도 견디기 힘든 인생의 한 마당이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만 주목할 수 있다면. 하나님만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만 기다릴 수 있다면.
지난 주간은 기도원을 찾았다. 생각하고, 기도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원에서 보내는 화요일 아침이었다. ‘오늘은 하나님의 호흡을 느끼며 그분만 생각하리라.’
이른 시간에 기도원 산책길을 나섰다. 넓지는 않지만 정겨운 오솔길. 단정하게 정리정돈되지는 않았지만 무질서 속에 피어나는 생명의 역동성. 아름드리 큰 나무도 작은 들풀을 무시하지 않고, 하찮은 잡초도 화려한 꽃을 부러워하지 않는 부조화 속에 엿보이는 아름다운 하모니.
어떤 식물은 시들어가고, 어떤 식물은 싱싱하다. 어떤 나무는 이미 죽어 고목이 되었는가 하면, 어떤 나무는 이제 생명의 기운을 자랑하며 힘차게 솟아오른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손길 아래 머무는 존재이다. 각기 모양은 다르고, 생명의 기운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바랄 뿐이다. 하늘이 내리는 공기, 하늘에서 비취는 태양광선, 하나님이 내리시는 이슬과 비. 그것으로 그들은 생명을 연명한다.
아스팔트도 깔지 않은 주차장을 이리저리 거니는 동안, 내 얼굴에 다가오는 날파리떼들. 귀찮다 싶었지만, 날려버리거나 쫓아보내지 않기로 했다.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싶었다. 내 얼굴 주변을 맴돌아 귀찮았지만, 그게 내 마음을 동요시키지는 못했다. 얼굴 주변만 맴돌 뿐 나를 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나를 해하는 줄 미리 짐작하고 손을 내밀어 죽이려 했겠지?
기도원 길을 거닐었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났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눈인사를 하며 지나치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이니 그저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 그러나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적개심이 없다. 공격에 대한 위협도 느끼지 않는다. 무장해제가 가능한 영역이다. 안심해도 될 사람들이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니까.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한다.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비워본다. 하나님만 생각하고 기대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비운다.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사유의 세계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더 정직하고 가까이 느끼기 위해 복잡한 생각의 쓰레기통을 비운다. 좀처럼 잠재워지지 않는 감정으로 인해 힘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 순간 소용돌이칠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저장소를 깨끗하게 청소해 본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서 의지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고독감이 나를 괴롭히곤 했다. 그런데 이 순간만은 모든 의지적인 작용도 멈췄다. ‘이렇게 하리라, 저렇게 하리라.’ 그러나 부질없는 허사일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너무 강인해서 하나님의 의지마저 굽히려 했던 교만한 의지의 발동도 스톱시켰다. 그리고 하나님께 주목했다.
좀 더 깊이 하나님을 생각하기. 조용히 하나님의 얼굴 바라보기.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기. 이게 내 인생의 과제이리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우리가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다정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더 정확히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만히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잠잠히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의지적인 작용이 너무 활발하기 때문에 더 부요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
더구나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게다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잠잠히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의 얼굴만 구하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누군가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다. 너무 속상하다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다. 그런데 아는가?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더 멀어진다는 사실을.
그때 정말로 필요한 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잠잠히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움직여 일하실 때까지.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는 말한다. “우리가 자아를 죽이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잠잠히 머물러 있게 될 때 하나님은 일어나셔서 자신을 보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