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칼럼] 달라이라마와 라마교(2)
2. 탄트라교의 특징
1) 탄트라교의 주술과 샥티신앙
탄트라교는 본래 인도의 고유 종교와 대승불교가 혼합된 것이었고, 티베트로 건너와 샤머니즘과 잘 융합되었다. 탄트라 불교신앙은 인도 불교에 뜻이 있던 티송테첸왕이 나란다 사원의 대학장인 산타 라크시타(Santa-laksita, 시와초라고도 한다, 725-783)를 티베트로 초청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티베트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산타 라크시타는 탄트라교의 ‘위대한 스승’인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를 초청했다. 파드마삼바바의 주술로 악령을 쫓아내고 반대세력을 압제하기 위해서였다.
파드마삼바바는 연화생(蓮華生)이라고도 한다. 그는 탄트라교의 중심지인 벵갈에서 수학하고, 두 사람의 아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력으로 모든 정령들과 악마를 항복시키고 티베트의 샤머니즘이 수용할 수 있는 많은 기적을 행하여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 티베트 샤머니즘과 혼합된 파드마삼바바가 들여온 탄트라 불교가 라마교이다.
티베트에서는 이 불교와 혼합된 본교를 백본교라 하고, 순수 불교를 흑본교라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순수 불교를 현교(顯敎), 주술적 불교를 밀교(Tantric Buddhism)라 한다. 밀교는 순밀인 우도(右道)밀교 금강승(Vajrayana)과 성애적 잡밀인 좌도(左道)밀교로 구분된다. 밀교는 추상적 범신론적 不二나 열반을 추구하는 대신, 유신론 종교 형태를 띠고 샥티(Consert)신앙, 기복신앙, 신비주의, 주술신앙 등으로 특징지워진다.
우도밀교(daksinacara-vajrayana)는 금강정경에 따라 남성원리와 여성원리를 형이상학적으로 조화시켰다. 그러나 좌도밀교(vamacara-vajrayana)는 시륜경(時輪經, Kala-cakra)에 따라 두 원리를 정신적으로 뿐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밀교의 성애신앙(샥티신앙)은 힌두교의 샥티신앙이 티베트 불교로 건너가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에 우주적인 힘이 있다고 믿으면서, 생식 기능에서 그 힘을 찾으려는 것이다. 우주적인 샥티와 결합함으로써 성불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라즈니쉬 아쉬람에서 시행되고 있는 힌두교의 군달리니 요가에서도 발견된다.
샥티신앙 내지 성애신앙에 관하여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개 모든 나신(裸身)의 여인은 프라크리티의 화신이다. … 만일 여인의 나신을 마주하고, 우주적 신비의 계시 앞에서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강력한 정서를 갖지 못한다면, 거기서 의식(儀式)이란 없고 업보적인 성적 결과를 동반하는 오직 속된 행위만 있을 뿐이다. 의식의 두 번째 단계는 여자 프라크리티를 샤크티여신의 화신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다. 요가 행자가 신의 화신이듯 그의 파트너는 여신이 되는 것이다. … 모든 활동은 샤크티 여성 편에서 행해진다. … 요가 행자는 자신의 파트너인 여자 요기를 타라(Tara) 여신의 실체로 생각한다.”
엘리아데는 밀교수행시 “마이투나(Maithuna, 性交)는 입문식의 필수적인 행위가 되므로, 스승(Guru)의 명령에 따라 수도승은 그들 정조의 법칙을 깨뜨린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다시 그 법칙을 준수한다”고 한다.
팔리어 경전에는 석가모니가 성(性)을 열반을 얻는 한 방법으로 간주하고 있는 수도사들에 관해 언급했다는 것과, 수도승 마간디카(Magandika)가 석가모니에게 딸 아누파다(Anupada)를 바쳤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로 인해 티베트의 밀교 승려(라마)들은 성욕주의자가 되었고, 신통력을 터득하여 몸은 불덩이같이 달구거나 물같이 흘러가게 하고, 우박이 내리게 하고 집을 파괴하며, 거미나 뱀, 개구리가 나타나게 하고, 남을 해치는 도술을 행하기도 하였다.
파드마삼바바는 이러한 라마교의 상징적인 인물이고, 첫번째 티베트 밀교사원을 건축한 사람이다. 그는 붉은 모자를 쓴 홍모파의 시조이며, 이 사원에서 불상들, 신들, 마귀들을 숭배하고, 불교의 이름으로 마술을 행하였다.
2) 탄트라교의 수법
삼매에 도달하려는 밀교적 수법에는 구밀(口密; Mantra, Dharani), 의밀(意密; Mandala), 신밀(身密; Mudra)의 세 가지가 있다. 구밀은 신에게 바치는 소리를 통해서, 의밀은 배열한 부처 그림을 통해서, 신밀은 몸가짐을 통해 삼매에 이르고 부처가 되려는 것이다.
소리를 이용해 삼매에 도달하려는 구밀에는 진언(Mantra)과 다라니(Dharani)라는 주문이 있다. 진언은 다라니보다 비교적 짧은 주문이고, 대개 옴(Om), 나무(Namo), 흠(Hum)으로 시작하여 사바하(svaha)로 맺는다. 옴 한 글자 속에 천 가지 진리가 들어 있다고 하며, ‘영원한 소리’라는 A, U, M은 모두 복수적 현상계 뒤에 있는 근본적이고 단순한 진리이고, 무한자이며, 불이(不二)의 실재(non-dual-reality)이고 궁극자(the Ultimate)라고 한다. 이러한 진언은 “아마레 아마레, 비마레 비마레, 허메 허메”와 같은 뜻 없는 말과 뜻 있는 말의 혼합으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진언 사용 중 마음이 집중되면 무의식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옴-명상(Om-meditation)은 힌두교 화장터의 신 옴과 같이, 불교에서도 옴 자체가 무한자이며 궁극자가 되기도 한다. 옴-기법 가운데 A는 깨어있는 자아 상태(waking)의 경험이고, U는 꿈꾸는 상태(dream)와 같은 미묘한 경험이고, M은 의식의 깊은 잠에 빠진 상태(deep-sleep)이며, 모든 복수의 차이를 초월하여 통합적 하나가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옴’은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명사에 사용되며, ‘Om namo Amitabhaya Buddhaya’, 또는 ‘Om mani padme hum’등 무수한 주문들이 있다. 지금도 티베트에 가면 ‘Om mani padme hum’을 새긴 마니통을 돌리며 다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삼매에 달하려는 기술 중 신밀(Mudra·무드라)은 인장과 같이 진실하다 하여 인계(印契)라 하고, 그 목적은 특수한 몸가짐을 통해 부처의 세계와 계합하는 것이다. 무드라의 손모양은 명상, 곧 공포 퇴치, 설법, 예배 등 9가지 제스처가 있다. 16세기 유명한 무드라 수행가로 홍모파의 타쉬라마(Taschlama)가 있다. 그는 불교의 이름으로 마술을 행하여 숨 조절과 요가로 자기 몸을 잠가 두고 남의 몸으로 이사해 들어가거나, 남의 생각을 읽어내고, 원거리에서 투시하고, 벗은 몸으로 대추위를 물리치고, 과거 존재를 파악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신밀을 실행하는 밀교도들은 자기 집에서부터 두 발자국마다 얼굴, 두팔, 배, 두 다리를 길게 뻗어 온 몸을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 절하면서 랏사의 사원까지 가는 고행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절을 하는 사람들을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밀교도들은 아침마다 700번씩 이러한 절을 반복하기도 한다.
7세기부터 티베트에서 발전한 밀교의 의밀은 판테온(Pantheon)과 만달라(Mandala)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만달라는 부처와 보살을 배열하여 불교의 세계관을 그려 놓은 도형이다. 티베트 불교를 규정짓는 좌도밀교의 세계는 7층 세계로 되어 있고, 그 최고 위치에서 본초불(Adibuddha)이 다스리고 있다. 그는 푸른색 몸을 한 나체 아라한으로 묘사되어 있고, 흰색 나체의 샥티를 껴안고 있는 동안 끝없는 명상(meditation)에 잠긴다. 이것은 절대자와 세상과의 결합을 상징한 것이다.
아디불은 영원히 고요하며 동하게 하는 자이며(verharrende Beweger), 그 샥티는 움직여진 자(das Bewegte)이며, 그 남성적 원리와 여성적 원리는 우주의 모든 것을 낳는다. Adi불(본초불)은 시륜불(Kala-cakra-Buddha) 또는 금강신(Vajrakaya)이라 하고, 다른 부처들이나 신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도 한다. Adi불 밑에는 다섯 명상불(5 Meditations-Buddhas)이 있다. 이 명상불은 역시 아디불과 같은 명상에 잠겨 있다. 이 명상불들을 5쟈니불(Dhyanibuddha) 또는 5 Jinas(Sieger)라고도 칭한다. 이들은 아디불에서 유출된 부처들이며, 그 부처들의 중앙에 대일여래(Vairocana)가 있다.
만다라는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사방에 모든 부처와 보살을 배열해 놓는다. 이 대일여래는 일반적으로 밀교의 교주로 숭배되고, 홍모파에 의해 우주의 지배자로 숭배된다. 대일여래의 동방에 있는 묘희국(妙喜國)에는 아축불(Aksobhya)이 있다. 아축불은 일체 성내지 않는다는 서원을 세우고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하였다고 하며, 더러움이 있는 청정한 보리심을 나타나게 한다는 부처이다. 이 아축불은 황모파의 최고신이며, 푸른 몸을 가지고 있고 마귀 마라를 이겼다고 한다.
서방에 있는 극락정토에는 아미타불이 있다. 그는 대승불교적 전통을 그대로 전승하여 신봉되는 구세주역 부처이며, 중생을 구제하려는 48원을 세웠다 하여 많은 신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몸 색깔은 페르샤의 해신과 같은 붉은색이다. 남방에 있는 환희국(歡喜國)에는 보생불(Ratnasambhava)이 있다. 그는 일체의 복덕과 재보를 모아 중생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부처로 신봉된다. 그는 황금색 몸을 가지고 있다.
북방에 있는 연화장엄국(蓮華莊嚴國)에는 불공성취불(Amoghasiddhi)이 있다. 그는 원만하고 결함 없는 공덕을 구비하여, 능히 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큰 소원을 성취케 하여 공(空)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부처다. 그의 몸 색깔은 흑색이며, 4면뱀의 주인(主)이기도 하다. 만달라는 이 4방불이 각각 4보살에 둘러싸여 있게 하고, 이 16보살에게 모두 ‘옴’으로 시작하는 진언이 염불된다.
밀교는 이 밖에 일체 중생의 병을 고쳐 준다는 동방정유리국에 사는 약사불(藥師佛)과 그 좌우보살(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등, 무수한 신들과 다섯 역사적 인물들을 부처로 숭배하고 있다. 이 밖에 다섯 불제자들과 석가모니 이후 유명한 불교도들, Nagarjuna, Padmasambhava, Tsongkhapa, 제5대 Dalai Lama (1938- 1990), Panchen Lama, Nagas(뱀), Garudas(새), Citapati(해골), Demons(코끼리 또는 악마), Witches(마녀 또는 무당)등이 숭배대상들이 되었다.
3. 밀교의 ‘합일의 철학’
탄트라 불교가 무엇이며 왜 타락했지는 ‘탄트라, 더 없는 깨달음의 세계’라는 아래의 설명에서 간파할 수 있다.
“전체(the whole)에는 경계선이 없다. 그대는 전체처럼 되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만남과 합일이 가능하다. 텅 비어 있을 때 그대는 경계선 없이 존재한다. 돌연 그대는 전체가 된다. ‘나’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전체가 된다. ‘나’가 존재하면 그대는 추한 에고가 된다. 그러나 ‘나’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계 전체가 된다. … 무가 되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성취된다. 죽어라! 그러면 신이 된다. 사라져라. 그러면 그대는 전체가 된다. 여기에서 하나의 물방울이 사라지고, 저기에서 거대한 바다가 태어난다. (중략) 거대한 심연 속에 그대 자신을 방치하라. 일단 방치하면 그대는 심연 자체가 된다. 이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의 심연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이 심연에는 끝이 없다. 무가 어떻게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유(有)에는 끝이 있다. 반드시 종말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무는 영원하다.
마하무드라는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완벽한 오르가즘이다. 존재의 근원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간혹 수영 같은 것이 느껴지면 나는 수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한 행동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잠이 찾아오면 나는 잠을 잤다. 그런 일들이 저절로 일어났을 뿐 거기에 행위자는 없었다.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곳에 존재할 뿐이었으며, 수많은 일들이 저절로 일어났다.
마하무드라(mahamudra)는 최후의 경험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마하무드라는 궁극적 경험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와 하나가 되는 전체적인 오르가즘을 뜻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간혹 상대방 안으로 녹아드는 것을 느낀다. 더 이상 둘이 아니다. 몸은 분리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이 황금의 다리를 놓는다. 내면에서 둘이 사라진다. 하나의 생명 에너지가 두 극단에서 진동하고 있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만이 마하무드라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탄트라의 존재는 공(空)이며 비존재이다. 어떤 것(something)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다. 그것은 무아(無我)이지 자아(自我)가 아니다. 자아는 허구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적 궁극자와 합일의 신비주의는 인도 베단타(vedanta) 철학 사상과도 병행되고, 또 위와 같은 성적 합일의 초윤리적이고 율법폐기론적인 무아론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밀교는 이러한 궁극적 합일의 신비를 연인의 사랑을 통해 실현한다.
“그대의 경험을 통해 설명해 보자.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대는 무가 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무아(無我)가 된다. … 사랑할 때 그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nobody)’이 되어야 한다. 두 연인이 서로의 편에 서 있을 때, 또는 두 개의 무가 함께 앉아 있을 때, 이럴 때만 만남이 일어난다. 장벽이 무너지고 경계선이 사라진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에너지가 이동한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 이렇게 깊은 사랑의 순간에만 오르가즘이 가능하다. 두 연인이 섹스를 하면서 무아가 되었을 때, 오르가즘이 일어난다. 그들의 존재 전체가 정체성(identity)를 상실한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은 거대의 무의 심연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한순간에만 일어난다.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 그들은 자신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사랑 안에서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방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갑자기 둘이 사라진다. 마하무드라의 차원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하무드라는 존재계 전체와 하나가 되는 절정의 오르가즘이다.
탄트라에서는 두 연인 사이의 깊은 삽입, 환희에 찬 삽입 또한 ‘마하무드라’라고 부른다. 탄트라 사원과 책에는 깊은 오르가즘 상태에 든 연인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궁극적 오르가즘의 상징이다.”
위와 같은 무아적 합일의 철학은 아래와 같은 탄트라교의 율법폐기론적 사랑의 추구로 사회 타락의 요소가 되었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노력하면 에고가 강화된다. 노력하는 순간 ‘나’가 들어온다. 사랑은 노력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대가 노력한다면, 거기에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라. 사랑 안으로 들어가라. 사랑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노력하지 말라. 사랑 은 행위가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전체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력하지 말라. 다만 그것과 함께 흘러가라.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이것이 탄트라의 길이다. 이것이 탄트라의 근본이다. 요가는 노력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요가는 에고를 지향하다 마지막에 에고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처음부터 무아(無我)를 지향한다. 요가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제 에고를 버려라”고 말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처음부터….
요가가 끝나는 곳에서 탄트라가 시작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요가의 최정상이 탄트라의 출발점이다. 탄트라는 그대를 궁극의 목적지로 데려간다. 요가는 탄트라를 위해 그대를 준비시킬 수 있다. 그것이 전부다. 궁극적인 것은 노력이 없을 때 온다.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울 때 궁극의 문이 열린다. … 그대 자신과 싸우지 말라. 유연하게 대처하라. 그대 주변에 인격과 도덕이라는 틀을 만들지 말라. 그대 자신을 너무 계율에 얽어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계율은 속박이 된다. 그대 자신을 감옥에 가두지 말라. 유동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라. 상황과 더불어 움직여라. 현재 직면한 상황에 대응하라. 인격이라는 갑옷을 입고 움직이지 말라. 고정된 태도를 갖지 말라. 얼음처럼 굳어지지 말라. 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여라. 항상 유연하게 흘러가라. 자연이 어디로 인도하건 그대로 따라가라. 저항하지 말라. 그대 자신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라.” <계속>
/이동주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은퇴, 현 선교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