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사회는 왕궁 내의 암투와 당파 간의 싸움으로 유약했고 마구 흔들렸다. 결국 우리 민족은 1910년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한일합방을 맞았다. 35년간의 일본 압제 하에서 우리 민족은 온갖 억울함을 참아야 했고, 수치와 모멸을 당해야 했으며, 고통과 눈물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지긋지긋한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하기 위해, 3·1절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독립투사들이 끊임 없는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서, 안 되니까 만주 땅으로 도망가서, 심지어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투쟁을 벌였다.
그때 한국교회도 정신계몽운동과 애국사상 고취에 주력했고, 음양으로 항일투쟁의 선두에 섰다. 드디어 1945년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미국과 유엔 연합군에게 백기를 들었고, 우리는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누렸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유다 민족의 망국과 해방의 역사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으려 한다.
첫째, 망국의 아픔을 가져 온 원인을 바로 알아야 한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비참한 신세가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원인을 하나님을 진노케 한 데서 찾았다. 하나님을 진노케 한 이유가 무엇인가?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렘 32:31-32).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1년, 호세아왕 9년에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왜? 역대 왕조가 한결같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여러 이방 우상들을 섬기고, 정의와 공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왕국 멸망을 예언하고 애절하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그러나 패역하고 강퍅하고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았다. 돌이키지 않는 백성은 어쩔 수 없다. 패망할 수밖에!
남유다 왕국은 이 모습을 다 보았다. 그러면 반면교사를 삼아 패망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유다 왕국도 B.C. 586년 신흥 바벨론 제국에게 패망했다. 사실 요시야 왕은 기울어져 가는 왕조를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우상을 척결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절기를 회복하고, 율법대로 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의 몸부림도 허사였다. 왜? 성경은 이렇게 고발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왕하 23:26).”
요시야 왕의 몸부림을 능가하는 죄의 보응은 있었다. 그것은 므낫세 왕의 죄이다. 그는 하나님이 용서의 카드를 빼들 수 없을 지경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자비와 용서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지 않기로 작정하시도록 만들어 버렸다.
요시야 이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운동을 살려가지도 못했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로 이어지는 왕들에게는 동일한 성경의 평가가 있다.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 23:32, 37, 24:9, 19).” 바른 길을 갈 줄 모르는 왕들이었다. 그러한 왕들 밑에 있는 백성들은 싸잡아 오물구덩이로 들어가고 말았다.
우리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광복 70주년을 맞는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더 이상 죄를 쌓지 말아야 한다. 멸망을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다. 가던 길을 멈춰야 한다. 조선 말기 사회가 그러했듯, 우리는 세상에 취해 있을 수 없다. 더 이상 조선 말기처럼 패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대원군이 쇄국정치로 복음이 들어오는 걸 차단하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피를 흘렸던 것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과 교회를 훼방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기억할 사실이 있다. 바벨론 포로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에게서 희망과 가능성의 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꺾으실 것이라고 했다. 1년만 있으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시키시고, 유다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설교했다. 듣기 좋은 설교다. 은혜로운 설교다. 희망을 주는 설교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이게 무슨 말인가? 바벨론 포로가 재앙이 아니라는 게다. 오히려 평안이라는 게다. 오히려 미래와 희망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체 뭐 이런 설교가 있단 말인가? 빨리 바벨론에서 벗어나야지. 악한 바벨론을 심판해야지. 그리고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지. 그게 하나님의 뜻이지.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설교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뺨을 맞고, 구덩이에 던져지고, 감옥에 갇혔다. 마치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낙심하고 절망할 건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좀 길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 70년이라는!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1-2).” 바벨론 포로 기간에 그들은 생각해야 했다. 70년 후에 돌아가게 될 것을! 그들은 기다리면서 바라봐야 했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아무리 지루하고 답답해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신다. 약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생각지도 않았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사용하신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시온 성으로 돌아오도록 도왔다.
물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그랬듯, 고레스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하다. 해방과 귀환의 주역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세 차례의 포로 귀환을 통해 유다 백성들의 해방을 이루셨다. 기억하자. 하루아침에 이루진 게 아니다.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지루해도 한 방에 대박을 터뜨리고 싶어하는 욕구를 집어 던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해방 프로젝트’를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던 원복음을,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성취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 인류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 내 마음 문을 여시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심으로 개인적인 구원과 해방 프로젝트를 이루셨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1차, 2차, 3차 귀환으로 지연되는 때를 믿음으로 기다렸던 것처럼, 작금의 한국교회와 성도들도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라나타 신앙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애굽과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을 떠나, 완성된 하늘나라에 이를 해방의 날이 다가올 것이다. 이 땅에서 흘리는 눈물과 피를 보상하시고 위로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신랑 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는 순결한 신부로, 완전한 해방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 아니 오늘 하루하루가 바벨론의 포로 생활 같지만,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주님이 우리 안에서 해방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 이 모든 구원 프로젝트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여전히 우리의 희망은 신실하신 하나님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