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칼럼] 대승불교의 세계관과 승려 성철(2)
그러면 이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850년경 중국의 고승 황벽도 모든 인간의 본성이 불성이라고 보았고, 그도 이 불성을 그보다 200년 전에 태어난 원효대사와 똑같이 일심(一心)이라고 했다. 그 一心이란 개인의 마음이며 동시에 세계의 마음이다.
일심은 야스퍼스(K. Jaspers)가 표현한 ‘포괄자(das Umgreifende)’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즉 이 모든 현상계를 착각으로 여기고, 단수와 복수의 구별을 극복하며,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신비한 상태가 ‘일심’이며 ‘열반’이다. 스즈키(D. T. Suzuki)나 겝서(I. Gebser)는 황벽의 ‘일심’을 아무 곳에도 없는 것, 안에나 밖에나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 ‘공’이라 하고 또 ‘불성’이라 하였다.
원효(617-686)의 통불교적 중심 개념도 역시 ‘일심’이며, 그도 일심을 불성과 동일시하였다. 이기영은 원효의 ‘일심’을 ‘포괄자’ 또는 ‘무이’라 하며, 주체와 대상이 구별되지 않은 하나의 마음 또는 전체의 마음으로 설명했다.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본래 다르지 않다(일심동체)는 말이다. 원효는 일심을 ‘무소유’라 하여 ‘머무는 곳이 없는 것’으로 설명하며, ‘일심’은 모든 지식과 개념과 의미를 멸함으로써 달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열반’이며 이 열반의 상태를 ‘멸아’라고 한다.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종의 6대 조사 혜능은 사람의 마음을 불성과 동일하다고 하고, 일본의 스즈키 역시 불성을 마음(心)과 동일하다고 한다. 겝서는 황벽의 ‘心’ 개념을 Geist(心) 내지 Nichtgeist(無心, 空) 또는 der eine Geist(一心)라고 번역하며, 절대자라고도 번역한다. 心이 Geist이며 동시에 Nichtgeist라고 하는 말은 有이며 동시에 無라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 공한 상태가 불성의 상태이며, 주체와 대상이 통일된 상태가 열반이다. 고승 황벽이 “나는 절대자 안에 거하고 절대자는 내 안에 거한다”, “나는 절대자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인간을 신격화한 상태가 바로 열반이고 일심이다.
고려 시대의 승려 지눌 선사(1158-1270)는 자기의 신령한 마음을 부처라 하고, 부처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원래 심성은 깨끗한 것(공한 것)이고 이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룬 것이라고 한다.
지눌의 교리적 특징은 자기가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단박 깨닫고”, 뒤에 차례차례 수행할 것을 가르친 점이다. 깨달아야 할 내용은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인데, “잡념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이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불성을 동일시하는 사상은 과거 보디달마(Bodhidharma)에 의해 발전됐다. 선불교적 구원은 다름 아닌 자기의 불성을 깨닫는 것이고, 또 그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는 데(bodhi) 그 특징이 있다. 제6대 조사로 임명받은 혜능(638-713)도 역시 인성을 불성이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깨달아야 할 내용이고, 외부에 의해서가 아닌 내적인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자기를 절대자(부처)와 동일시하는 황벽은 중생을 부처이자 법이고 무심이라고 하며, 본래 마음은 청정한 것(空한 것)이라고 한다. 부처가 바로 중생이고, 생사가 바로 열반이며, 번뇌가 바로 보리(각)라고 한다. 그러므로 부처란 일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자기 마음이며, 구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음으로써 자기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참선의 목적이라고 한다. 만일 집착하면 내(我)가 생긴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려면 내가 되지 말아야한다.
고승 혜해(720-814)는 사람의 마음을 ‘부처님의 정토’라 하고 깨끗하다고 한다. 그러나 깨끗한 마음이란 뜻은, 깨끗함도 없고 깨끗하지 않음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생각을 내지 않음을 의미하며, 깨끗한 마음이라는 생각도 내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불심’에 대한 혜해의 해석을 동국대 출판부는 “머무는 데 없는 곳에 머무르는 마음”이라는 어귀로 번역하였다. 깨달음이란 가설이며 얻을 수 없는 것이며, 해탈은 무념을 얻을 때 도달하는 것이다. 이 무념의 상태가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며,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 그는 일체 처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해탈심 또는 보리심이라고도 하고, 불심은 무심이며 또 “해탈심도 없고 해탈심이 없음도 없음”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마음에 관하여 D. T. 스즈키는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이라고 한다. 과거의 心은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불가득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므로 불가득이고, 현재라고 하면 이미 현재는 지나갔으므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불교 사상이 한국에서도 원효나 지눌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원효는 사람의 마음을 불성이라고 하며, 일심(一心)을 열반이며 무소유라고 한다. “마음이 生하거나 머무름이 없다”는 원효의 가르침을 풀이하여 ‘머무는 마음’이란 “일체의 곳에 머무름이 없고 떠남이 없다”는 뜻이고, ‘생함도 머무름도 없다’는 뜻은 “마음에 머무는 곳이 없고 마음에 생함도 머무름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머무름이 없음’이고, ‘머무름이 없음’이 곧 ‘머무름’이라고 한다. 또 원효는 生 이라는 동사를 부정하되 “아직 나기 전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나지 않았으며, 이미 난 뒤에는 이미 있기 때문에 스스로 나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함으로써 무생(無生)을 주장한다.
생(生)이 없다는 근거를 원효는 용수의 공(空) 사상에서 찾는다. “空性은 生이 없기 때문에 마음도 항상 生이 없으며, 공성은 멸이 없기 때문에 마음도 항상 멸이 없으며, 공성은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마음도 머무름이 없으며, 공성은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마음도 무위이다”라고 한다.
원효의 이러한 부정적 세계관은 우주의 생성에 대한 이해를 창조주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우주 자체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는 무신론적 체계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미 난 뒤에는’이라고 말하면서도 원효가 ‘생(生)’에 대해 부정하는 이유는 바로 공(空) 사상 때문이다. 그러나 生이 없다는 논리는 “이미 난 뒤에”라는 말과 모순된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는 인간의 본성을 공성 내지 불성이라 하여 절대시하고, 현재적인 해탈을 추구하게 되었다.
3. 유가행과 열반
열반이란 ‘바나(불다)’에 ‘니르(부정사)’가 붙어 있는 단어이며, “불어서 끈다”라는 동사이다. 즉 번뇌의 불꽃을 불어 꺼버린 것과 같이 탐·진·치(貪·瞋·痴)와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지고, 일체의 苦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이 상태를 멸(滅), 적(寂), 적멸(寂滅)이라고 한다. 열반은 생존 시 열반과 죽음에 의한 열반이 있어 전자를 불완전한 열반, 후자는 완전한 열반이라 칭하고, 석가모니의 죽음을 입멸(入滅)이라 한다. 입멸은 등잔불을 끄듯이 괴로움을 느끼는 감각기관과 의식을 완전히 멸한 상태이다.
독일의 모리츠 빈테르니츠(M. Winternitz)는 이 열반을 ‘강경중적 마비(Kataleptische Starre)’로, 알프레드 포르케(A. Forke)는 ‘완전 최면(vollstäntige Hypnose)’ 상태로, D. T. 스즈키는 ‘영적 자살(geistiger Selbstmord)’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자기 부정’을 의미하는 ‘정적 열반(Statisches Nirvana)’을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적 낮은 차원의 열반이라 평가하고, 그와 대조적으로 ‘동적 열반(Dynamisches Nirvana)’을 주장한다. 그것은 열망과 근심에서의 자유함 또는 냉담함을 말한다.
열반의 의미는 4세기경 유가 행파(Yogacara)에 의해 보편의식 내지 세계의식(Weltbewußtsein)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유가행이란 힌두교의 요가행위를 계승한 것으로, 석가모니의 두 스승과 석가모니 자신의 수행을 통해 전승되었다. 미륵(Maitreya)에 의해 시작된 유가행파는 무착(Asanga 310-390)과 그 동생 세원(Vasubandhu)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들의 사상적 특징인 유식(唯識)이란 개념은 오직 의식 뿐(오직 마음에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유식이란 윤회의 주체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마음에 나타난 하나의 의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반이 공(空)하다는 것과 같다.
유가 행파는 유식설과 알라야식(阿라耶識)을 새로이 발견하여 철학적 기반을 갖추고 알라야식의 근거를 여래장(如來藏)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알라야식이란 무엇이 인간을 윤회하게 하는가를, 여래장이란 무엇이 인간을 부처가 되게 하는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불교는 모든 존재와 모든 인간의 경험을 의식의 범주에 집어넣기 때문에, 제법엔 아(我)가 없고 실체가 없으나 다만 식(識)만 있을 뿐이다. 그 의식은 6식 즉 眼·耳·實·舌·身·意와 제7식인 말라식(末那識)과 제8식인 알라야식이다.
말라식이란 6식을 통해 들어온 것들을 집착하는 자기중심의식이다. 알라야식은 만유를 보존하여 잃지 않게 하는 무몰식(蕪沒識)이며, 또 만유를 포용하는 장식(藏識)이다. 알라야식은 만유를 발생케 하는 씨를 간직하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전생에 지은 업이 창고(장)에 저장되었다가 현생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업은 윤회의 동기가 되지만 알라야식은 윤회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 알라야식은 다른 의식들과 함께 해탈하는 순간에 다 사라져 버리게 된다.
알라야식이 종식되면 그 순간 불성이 실현된다. 이 불성이 실현되는 이유를 설명한 개념이 여래장이다. 여래장이란 여래의 태(胎)라는 뜻으로 불성을 의미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래’란 거기(진리)로부터 이 세상에 왔다는 뜻이며, 거기에서 우주의 진리가 나왔다는 의미이다.
이와 병행하여 석가모니는 이 우주적 진리와 일치한 사람이고, 우리 안에도 이 우주적 진리 내지 영원한 불타가 내재해 있으므로, 일체 중생이 다 여래가 될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깨닫기 이전의 상태’는 여래장이고, 깨달은 후에는 부처이다.
부처를 실현하기 위해 인식 작용을 멸하고, 나와 세상의 이원론을 지양하는 방법이 요가이다.
요가의 기법은 필자의 힌두교 연구 편에 진술된 바와 같이, 인더스강의 문화적인 유산으로, 좌선을 하고 호흡을 조절하며 정신을 통일하여 열반에 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가는 석가모니의 8정도 마지막 단계인 정정(正定)과 같이 수도자가 최후의 삼매(samaj)를 준비하는 단계로서 모든 감각과 의식을 끊어 일체의 분별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때 마음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머물러,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더 이상 생각과 상상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적멸(寂滅)이다. 일체 의식과 지각이 멈춘 상태(滅盡定)이다.
그러나 요가 수련 중에 황홀경이나 최면에 빠지기 쉬우므로 촛불을 이용해 의식을 일깨우며 위치 바꿈을 하기도 한다. 숨(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면서 대상물에 의탁하여 코끝→심장→배꼽으로 옮겨가며 몰입한다. 이때 세계를 실체로 보는 의식이 점점 약해진다. 이것이 세속적 조건을 포기함으로 열반에 도달하는 길이며, 그곳은 다시는 목숨을 받지 않는 곳이다.
요가는 열반에 이르는 테크닉이다. 그러나 요가 수행 중에 체험에 몰두하다 초능력이나 마법사로 둔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이러한 능력들을 해탈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요기(요가행자)들은 요가 수행 중에 5가지 ‘신통지’를 얻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초능력, 천안통(眼), 천이통(耳), 타심통(他心), 숙명통(宿命)이다.
초능력은 분신술(여러 몸에서 한 몸으로 돌아옴), 둔갑술(눈에 보이게도 하고 안 보이게도 함), 장애물 뚫기, 수면 걷기, 가부좌하고 하늘을 날기, 달과 태양 만지기, 원근의 소리 듣기, 타자의 마음 보기, 전생 기억 등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불교와 힌두교 요기들의 공통 양태이다. 그러나 이 두 종교는 이러한 초능력은 본래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권장하지 않는다.
요가 중에 체험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일체의 분별심이 사라지고 마음은 정적에 머문다. 이때 마음은 환희, 평화, 초연, 온화함을 체험한다. ②중심에서 나오는 기쁨은 사라진다. 이때는 苦도 평안도 없다. ③모든 감각을 종식시키면 ‘무소유처’에 머물게 된다. 일체의 분별의식은 끊기고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 최면과 혼수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다. ④더 이상 생각도 상상도 하지 않는 적멸(寂滅) 속에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가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M. 엘리아데는 ‘열반’과 ‘삼매’의 상태를 구별하여, 열반(Nirvana)을 바람 또는 입김을 불다에서 파생된 말이며, 엄격히 말해 “숨이 멈춘 상태”를 지칭한다고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것은 원시 불교적인 열반의 상태이다.
그러나 삼매(samaj)란 열반에 이르기 전에 통과하는 어떤 예비단계로서 마음을 집중하여 한 점에 고정시키고 어떤 차별이나 구별도 거부하는 단계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 점이 불교와 힌두교 요가의 공통점이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사람도 ‘그가 있다’ 혹은 ‘그가 없다’, ‘그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있지도 않으며 없지도 않은 것이다”. 이 상태를 우파니샤드는 Neti!, Neti!(아니다! 아니다!)라고 하며, 신비주의적이고, 부정적으로 표현한다.
이 상태는 인간적 체험을 초월한 것이며 지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승불교적인 열반이나 대승불교적인 유가 행파의 열반은, 이와 같이 힌두교적 삼매의 경지와 같은 상태를 경험한다. 그러나 불교가 힌두교와 다른 점은, 인간의 본성을 불성과 동일시하여 스스로 깨우쳐 불타를 실현하려는 것이며, 어떤 신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고, 브라만이라는 ‘궁극자’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 불교는 기독교의 창조신앙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철저한 무신론과 자기확대에 빠지게 되어, 우주의 근원을 정복하고 또 그것과 동일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 신격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