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는 가데스 바네아가 아니고 자발 하룬은 호르 산이 아니다
들어가면서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여정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약 38년이란 긴 광야생활을 한 장소였기에, 그 위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호르 산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곳은 아론이 올라가 죽은 산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왕의 거절로 그의 영토 가운데로 나 있는 큰길(왕의 대로)로 지나가지 못하고 돌이켰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간 출애굽 사건에 언급된 장소들을 찾기 위해 많은 학자 및 탐험가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장소는 그리 많지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애굽 경로 중 핵심인, 홍해를 건넌 장소와 시내 산의 위치를 각자가 주장하는 장소에 맞추다 보니, 동일한 지명을 가지고 여기저기 서로 다른 위치에 설정하는 기이(奇異)한 현상도 발생했다. 더욱 큰 난제는 성경에서 같은 장소를 다른 이름으로도 기록해 놓은 것인데, 아직도 이들의 정확한 위치를 밝혀내지 못해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실례를 들면 신명기 10장 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라고 나온다. 그러니까 민수기 20장 22절에는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진을 쳤으므로(민 33:37), 브에롯 브네야아간(Beeroth Bene-Jaakan)이 가데스(Kadesh)이고, 호르 산(민 20:22-29)이 모세라(Moserah)인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브에롯 브네야아간과 가데스 바네아, 그리고 모세라와 호르 산이 같은 장소 또는 인근의 지명이라고, 아니면 각각 서로 다른 장소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브에롯 브네야아간과 모세라는 논외로 하고,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에 대해서만 검토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40년 출애굽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광야에서 유랑한 곳이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진을 친 장소들이 제일 많고, 아울러 진을 친 장소들이 제일 많이 밝혀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엉뚱한 장소를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 결과 출애굽 경로를 밝히는 데 더욱 많은 혼선을 빚게 했음은 물론, 그로 인해 2천 년 가까이나 세상 사람들이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를 잘못 믿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에 관련된 고대 문헌의 기록들을 살펴 보면서, 전통적으로 믿어온 요세푸스의 주장은 무엇이 문제이고 성경이 말해 주는 위치 정보와 어떻게 다른지를 검토해 보면서, 도대체 그가 그런 주장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아볼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주장도 성경을 근거로 나왔으므로, 성경이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에 대해 말해 주는 정보와 달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서고고학에서 밝혀낸 자료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이론도 함께 검토해 보면서, 진짜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가 과연 어디인가를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1. 고대 문헌과 전승에서 찾아본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
헬라어로 페트라(Petra)는 히브리어로 셀라(Sela)이고 바위를 뜻한다. 아람어 성경인 탈굼(Targum) 역본들에서는 구약성경의 가데스(Kadesh)를 레겜(Rekem/Reqem),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를 레겜 기아(Rekem Giah/Reqem Geya)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페트라(Petra)의 원래 이름이 레겜이라고 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들어온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는 페트라이고 호르 산(Mount Hor)은 페트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 중에서 제일 높은 자발 하룬(Jabal Harun)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서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찾아 본 고대 문헌의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1) 고대 이집트 제18 왕조(BC1550~BC1292) 때의 가나안 원정 기록과 기원전 1400년경의 아마르나(Amarna) 편지들에서 페트라를 묘사한 것으로 여겨지는 펠(Pel), 셀라(Sela) 또는 세일(Seir)이라는 문자가 나타난다. 이 기록에 의해 기원전 16~14세기경에 이 지역에 인류가 정착한 사실이 확인되었고, 산악지대에 에돔 족속이 살았다는 구약성경의 기록들도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다.
2) 1947년 사해 서쪽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BC 2~AD 1)에 레겜이 나타나는데, 이 레겜이 페트라를 묘사하고 있어 페트라가 가데스 바네아임을 입증해 주는 하나의 근거라고 한 종교 관련 사전이나 서적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 근거로 제시한 사해문서 ‘4Q462’에 대한 영문 번역본들을 찾아 보았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 문서는 잘려나간 부분이 많아, 남아 있는 일부분만을 가지고 번역한 때문인지 똑같은 히브리어 원문인데도 역본 간에 그 내용이 많이 달랐다. 그 주제들만 비교해 보아도, ①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묵상(Meditation on Israel’s History) ②다가오는 빛의 시대(The Era of Light is coming) ③이집트와 예루살렘의 빛과 어둠(Light and Darkness in Egypt and in Jerusalem) 등으로 역본마다 서로 달랐다. 그리고 오직 ①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묵상”에서만 레겜(Rekem)이 나올 뿐이었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레겜은 셈, 함, 야벳, 그리고 야곱이 등장하는 문장 중에 나타나고, 그 사이에 사라진 글자들이 많아 참뜻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여러 영문 역본 중에서도 레겜이 오직 한 곳에만 나타나, 번역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재고의 여지를 남겼다. 따라서 이 사해문서 “4Q462”의 레겜이 페트라를 가리킨다는 표현은 그 증거를 확인할 수가 없어 지나친 논리의 비약으로 판단되었다.
“Frag. 1 2[ . . . Shem and] Ham and Japheth [ . . . ] 3[ . . . ] to Jacob, and he [said . . . ] and remembered [ . . . ] 4[ . . . ] to Israel [ . . . ] Then [they] shall say [ . . . ] s[ . . . ] to Rekem we went, for [ . . . ] was taken [ . . . ] 6[ . . . ] to slaves for Jacob in love [ . . . ] 7[ . . . he will] give it as a possession to many.” (참조: Dead Sea Scrolls, 4Q462, Meditation on Israel’s History, E.M. Cook, 1996, London Harper Collins)
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기 바로 전 모압 평지에 도착해 진을 쳤을 때, 모압 왕이 미디안(Midian)의 12 장로와 점성술사 발람을 포섭하여 바알 브올 사건을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을 황음에 빠지게 했고 역병에 걸리게 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했다.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디안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하여 모세가 비느하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만 이천 명의 군대로 미디안을 치게 했다. 이때 비느하스가 진멸시킨 미디안 중에는 다섯 명의 왕(민 31:8)도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레겜(Rekem) 왕이었다.
그런데 1세기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37-AD100)가 쓴 “유대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에 이 사건을 기술하면서, 이때 죽임을 당한 레겜 왕이 페트라를 건설한 자라서 그 도시의 이름을 레겜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레겜이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이 전투에 참여했다. 레겜은 죽임을 당한 미디안의 다섯 왕 중 한 명이었다. 레겜은 아라비아 전체 국가의 우두머리로서, 그가 건설한 도시를 수도로 삼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레겜이라 했다.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고, 헬라인들은 페트라라 했다”(참조: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iv. 7, 1- 4, 7)
그리고 호르 산에 대해서는, 페트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 제일 높고 그 밑은 가파르다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모세가 광야 길로 그의 백성을 이끌고 아라비아에 있는 페트라에 왔다. 페트라는 아랍인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중심도시로, 전에는 레겜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페트라로 부르고 있다. 거기에서 페트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 꼭대기로 아론이 올라갔다. 모세는 그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말했고, 그의 제사장복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인계했다. 가파른 산 밑에 있는 모든 회중이 바라보는 앞에서 그는 죽었다.”(참조: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iv. IV, 82-83)
4) 3~4세기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AD 270~AD 340)도 325년에 저서인 “성경지리사전(Onomasticon)”에서 레겜에 대해 언급했는데, 요세푸스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
“페트라는 아라비아의 에돔에 속해 있는 한 도시이다. 욕드엘(Joktheel)이라 불렸고, 아람어로는 레겜(Rekem)이라고 했다. 레겜은 페트라인데, 이스라엘에 의해 죽임을 당한 레겜(Rokom)이 통치하던, 아라비아에 있는 한 도시이다. 그 레겜 왕은 스스로가 미디안(Midian/Madiam) 왕이라고도 했다.”(참조: Eusebius, Onomasticon sacr. 286, 71. 145, 9; 228, 55. 287, 94)
그리고 호르 산에 대해서도 역시 요세푸스의 주장을 좇았다.
“호르 산은 페트라에서 가까운 장소에 있다. 페트라에 가면 지금도 모세가 지팡이로 갈라서 물이 나오게 한 바위를 볼 수가 있다.”(참조: Eusebius, Onomasticon, 46, 14-16/126, 19s./176,7s)
5) 또한 제롬(Jerome: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AD348~AD420)도 400년에 쓴 “창세기 상의 히브리어 질문들(Hebrew Questions on Genesis)”에서 “심판의 샘이라고 불리는 가데스는 페트라 인근에 있다”고,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참조: Saint Jerome's Hebrew Questions on Genesis, translated by C. T. R. Hayward, p 46, Gen 14:7, 1995 AD).
6) 히브리 성경의 고대 아람어 역본인 “온켈로스 탈굼(Targum of Onkelos)”, “예루살렘 탈굼(Talgum of Jerusalem)”, “요나단 벤 우찌엘 탈굼(Talgum of Jonathan Ben Uzziel)” 등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가데스(Kadesh)를 레겜(Rekem)으로,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를 레겜 기아(Rekem Giah)라고 번역했다. 이 탈굼 역본들에서는 요세푸스 측이 주장한 “가데스가 레겜”이라고 한 것과는 같았지만, “레겜이 페트라이고 페트라가 가데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레겜(가데스)인 신 광야(Wilderness of Zin)에 진을 쳤다(encamped in the wilderness of Zin, which is Rekem)”고 해, 가데스 바네아가 페트라가 아니라 신 광야에 있다고 했다(탈굼 역본 민 33:36).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도 변화를 거듭해 왔다. 특히 패권을 쟁취한 강대국에서 채택하는 언어는 그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패권국이 채택하는 공용어도 함께 익혀야 했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널리 통용되고 있는 공용어로 번역돼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런 연유로 맨 처음 출현한 성경 번역본이, 기원전 3세기경의 헬라어 성경인 70인 역본(LXX Septuagint)이다. 그리고 3세기에 아람어 성경인 온켈로스 탈굼 역본(Targum of Onkelos)이 나왔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 이후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많아져, 회당(Synagogue)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경을 낭독하고 아람어로 통역해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러 세기 동안 지속해 오던 전통을 보완해, 바벨론에 거주하던 유대인 학자들이 만든 것이 온켈로스 탈굼 역본이다. 그 이후 예루살렘 탈굼 역본, 요나단 벤 우찌야 탈굼 역본 등 여러 역본이 나왔다. 예수님도 아람어를 잘하셨고,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 중 몇몇 구절이 아람어로 신약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요세푸스도 분명히 아람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 내용을 잘 파악하여, 가데스 바네아가 신 광야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세푸스가 가데스 바네아가 페트라에 있다고 주장했고, 유세비우스와 제롬도 그의 주장에 가세한 것이다.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이론이나 주장들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반드시 합치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요세푸스 측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 보면, 여러 의문이 제기됨과 함께 그들의 주장에 다소 문제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가 있다.
①모세에 의해 미디안 왕 레겜이 죽임을 당하는 출애굽 시대의 페트라는 에돔의 중심 도시였다. 모세가 에돔 왕에게 그의 땅 가운데를 지나가는 큰길(왕의 대로)로 통과하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거절당해 에돔 땅을 돌아서 가야만 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칠 때, 다 불사른 것은 미디안의 성읍들과 촌락이지 에돔 땅과 페트라가 아니다(민 20:14-21, 민 31:1-12).
② 에돔 땅과 페트라는 하나님께서 에서(에돔)에게 주신 땅이었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 때에도 무사했다(신 2:4-5, 수 15:1, 민 34:3).
③ 탈굼 역본에 이스라엘이 에시온 게벨 다음으로 “레겜(Rekem)의 신 광야(Wilderness of Zin)에 진을 쳤다(encamped in the wilderness of Zin, which is Rekem)”에서 알 수 있듯이, 가데스 바네아(레겜)는 분명히 페트라가 아닌 신 광야에 있다(탈굼 역본 민 33:36).
④ 페트라 인근의 자발 하룬을 호르 산이라고 주장했는데, 호르 산은 에돔의 중심부가 아니라 변경에 있다(민 20:23, 33:37).
⑤ 미리암이 페트라에서 죽었다고 했는데, 미리암은 분명히 신 광야에서 죽었다(민 20:1).
⑥ 와디 무사에 있는 모세의 샘에서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는데,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신 광야의 가데스이다(민 27:14, 신 32:51).
그런데 도대체 왜 요세푸스가 모세에게 죽임을 당한 미디안 왕 레겜을 페트라에 끌어들이고, 신 광야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를 페트라에 옮겨다 놓았을까?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왜 대부분의 학자가, 페트라가 가데스 바네아이고 자발 하룬이 호르 산이라는 요세푸스 측의 기록과 전승을 멀리하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에 관한 고대 문헌들 모두가 다 성경을 근거로 작성되었으므로, 그 어떤 이론이나 주장도 성경 전체의 내용과 일부분이라도 상충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계속>
저자: 강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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