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아프지만 나는 괜찮다. 하루라도 전쟁 없는 곳에 살고 싶다.”
105살의 노구를 이끌고 정든 고국을 떠난 비비할 우즈베키 할머니가 한 말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도시 쿤두즈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살아오던 곳을 떠나 수천 km를 건너 크로아티아 동쪽 국경 오파토바츠 난민촌에 도착했다. 20일 넘는 힘겨운 여정이었다. 사람들에게 업히고 들것에 실려서 이동하는,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도대체 왜? 하루라도 전쟁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고국 아프간은 전쟁과 억압으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다. 그곳은 전쟁 때문에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다. 그칠 줄 모르는 전쟁과 빈곤 때문에 남은 삶이라도 더 낫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를 포함해 가족 17명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20일 넘는 여정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숱한 산과 사막, 바다, 그리고 숲을 지나는 고달픈 여행을 했다. 넘어져서 머리를 다치기도 했다. 아직 그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는 스웨덴이다.
내 마음속에도 할머니가 남긴 말이 떠나지 않는다. ‘하루만이라도 전쟁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은 쉬지 않는 싸움과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솔직히 말해 보자. 내 자신의 내면세계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조석으로 달라지는 내 마음을 주체할 수도 없다. 감정도 하나 통제하기 힘들다. 기쁘고 행복하던 감정도 한 순간, 작은 일로 불쾌하고 짜증스럽게 변한다. 그 감정을 추스르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어디 그 뿐이던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살고 싶지만, 그게 쉽사리 되지 않는다. 내 속사람으로는 성령을 따라 살고 싶은데, 겉사람은 자꾸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도록 충동질한다. 잘못된 길을 가다 정신이 번쩍 들어 회개하고 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건만, 다시 내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하다. 또다시 어리석은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오호라 곤고한 인생이라’고 고백한다.
어제는 두 건의 결혼식이 있었다. 한 건의 결혼식은 의미가 있었다. 올 봄 남녀 전도회가 주관해서 바자회를 했다. 그때 수익금을 갖고,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힘들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혼식을 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자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한 가정이 유일하게 신청을 했다. 원래 서너 가정의 결혼식을 생각했기에 고민을 했다. 그런데 추석 명절에 이들 부부가 가족들에게 이미 다 광고를 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결혼식을 진행했다.
나는 ‘행복의 오솔길을 거니는 부부’라는 제목으로 주례사를 했다. 행복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결혼이지만, 실제로 불행의 오솔길을 거닐다가 불행의 문을 닫고 나오는 부부도 적지 않다. 그래서 ‘행복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행복의 오솔길을 거닐다가, 행복의 문을 닫고 나와서,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의 나라 천국의 세계로 나아가는 부부가 돼라!’고 당부했다. 이들 부부가 정말 그렇게 살기를 기도한다. 다행히 안 믿던 남편과 어머님과 형제들이 앞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 할렐루야!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인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주변을 둘러보라. 행복을 꿈꾸며 결혼을 했지만, 실제로 다투고 전쟁을 치르며 사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단한 일도 아닌데 피 터지게 다툰다. 훗날 생각하면 ‘푸~후~’ 우스꽝스러운데. 유치해서 부끄러운데. 그래도 그때는 목숨 걸듯 다투고 싸운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이는 결혼을 선교라고 표현하기도 하지 않던가. 지면 인생이 절단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사실 이기는 게 지는 것인데. 지면 이기는 것인데. 그런데도 잘 안 된다.
구태여 정치판을 운운할 건 없다. 정치판이야 정치판이니까 어차피 그렇다손 치고, 성결해야 할 교회는 어떤가? 오늘날 교회도 국회판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신의 생각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자기 주장이 무시당했다고 등을 돌리고 얼굴을 붉히며 싸우려 든다. 한 번 삐치면 끝까지 해보자는 식으로 대든다.
교회 안에서 안 되니 당회에서 치리하고, 당회에서도 안 되니 노회로 가고 총회까지 올라간다. 그것도 안 되면 세상 법정으로 가서, 세상을 판단해야 할 교회가 세상의 판단을 받고 있다. 분명히 성경이 금하고 있건만, 자기 감정과 생각대로 휘저으려 한다. 교회가 전쟁터로 변질되고 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닌가.
성도는 십자가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한 자이다. 그러니 화목케 할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말씀을 주셨다.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불화와 다툼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 내의 싸움과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 하나님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런 교회를 기대하고 있다.
혹시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는가? 그래서 전쟁 없는 세상을 찾느라 우왕좌왕하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전쟁 없는 세상은 없다. 성경은 평화의 세계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 65:25).”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메시야가 통치하는 나라에서나 전쟁이 없는 세상을 기대할 수 있다. 이 땅을 넘어 죄가 사라지는 완성될 천국에서야 가능한 기대이다. 이 땅에서 소망을 찾는 게 아니라, 고개를 하늘을 향해 들고, 하루하루를 그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