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칼럼] 이슬람 내부자운동의 번역성경과 상황화 신학(2)
2. 유일신 종교의 신 명칭
성경 말씀을 선교 현지에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고심하는 번역 선교사들의 임무는 선교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이며, 선교사는 번역 도중 발생하는 큰 영적 싸움으로 희생되기도 한다.
필자는 내부자 지도자들에 의해 번역된 새 성경이 기독교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 바로 제시하고 있는지를 성경적으로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에서 밝혀진 바와 같다. 하나님은 이름을 가진 분이시다. 이사야 24장 15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증거하는 바와 같다. 열국이 예배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지, 아랍의 신 알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유일신’으로 일컬어지지만, 여호와와 알라를 아랍인들도 전혀 동일시하지 않는다. 알라는 구약적 신(神) 명칭인 여호와와도 같지 않고,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지니고 있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도 같지 않다. 위와 달리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 이름은 세례를 베풀고 교회에서 축복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선교사역의 명령자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위 성경 원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단 한 가지 유언이다. 그 내용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고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이다. ‘이름’이라는 그리스어 중성명사는 삼인칭 단수명사로 돼 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신 하나님이심을 확인하는 명사이다.
이슬람의 알라는 아들도 성령도 없는 신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 명칭을 이슬람의 반삼위일체적 신 명칭으로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중동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슬람의 알라와 같은 단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선교사들의 사역이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필자는 이슬람권에서 기독교의 신 명칭을 반삼위일체적 ‘알라’로 칭한 것이 복음 증거에 큰 장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꾸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적하여 아래와 같이 선포한다:
“하나님과 선지자들을 믿되 삼위일체설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복이 되리라. 실로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니 그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노라(Sura 4:171)”.
“하나님이 셋 중의 하나라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라.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한 것을 단념치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벌이 가해지리라(Sura 5:73)”.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아들 예수야 네가 백성에게 말하여 하나님을 제외하고 나 예수와 나의 어머니를 경배하라 하였느뇨 하시니, 영광을 받으소서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아니했으며 그렇게 할 권리도 없나이다. 제가 그렇게 말하였다면 당신께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Sura 5:116-117)”.
꾸란은 알라 외의 존재는 예수를 포함해 다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노예와 주인일 뿐(Sura 19:93)이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알라의 노예라고 증거한다(Sura 4:172). 종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도 아버지는 없다(요일 2:23). ‘종’은 하나님을 오직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요 15:15).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용서받은 일 없는 죄의 종으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 교회사에 가장 기여한 니케아 신조(Nicaeno- Constantinopolitanum)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을 ‘οὐσία’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삼위를 구별하기 위해 ‘ὑπόστασις’ 개념을 채택했다. 이 ‘ὑπόστασις’는 본질 대신 ‘인격’이라고 번역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파괴할 수 없는 일체임과 동시에 파괴할 수 없는 구별이며, 전자가 후자를, 후자가 전자를 지양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위는 서로 바뀔 수 없는 하나의 본질이시며 세 인격이시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구별(Selbstunterscheidung)’이란 ‘자기 분리’의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이실 수 있으며(요일 4:16), 인간에게 오시며 우리와 관계하신 하나님 즉 ‘우리를 위한 하나님(Gott für uns)’으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니케아(325)와 콘스탄티노플(381)에서 열린 총회는 그들이 채택한 신론에 대해 “하나님의 비밀이나 하나님의 본질을 규정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현재하시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계시는 Lohse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이며, 하나님은 먼저 그의 보내신 아들에 의해, 그 다음에는 이어서 보내신 성령에 의해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다(요 16:7-14).
하나님의 계시 순서는 하나님-아들-성령 순이지만, 우리의 인식 순서는 성령의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도, 하나님께 갈 수도 없다. 성령을 받는 방법은 사도행전(2:38)에 기록된 바와 같고, 회개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 호칭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와 같이 ‘아버지’이다. 기도를 시작하며 하나님을 부를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칭하도록 한 것이다(마 6:9).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것이다.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양자’로 인정되었으므로(롬 8:15)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를 받은 것이다(요 1:12).
‘하나님의 자녀’란 무슬림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과의 생물학적 관련도 아니고, 인간의 신격화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 아들의 대속하심을 통해 속죄함을 받은 성도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개념이자 친밀성 개념이다. 아버지도 아들도 없고 아들에 의한 대속도 부인하며 성령도 알지 못하는 이슬람교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 자신의 영인 성령이 개입하셔야 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짓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4-16)”.
성경은 신명기 32장 5-6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친다. 창조된 인간과 하나님의 본래적인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라는 친밀한 인격적 관계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내 영광을 위해 창조한’, ‘내 아들들’, ‘내 딸들’”이라고 호칭한다(사 43:6). 또 딸 시온(사 1:8), 딸 애굽(렘 46:11), 딸 바벨론(렘 50:42), 딸 암몬(렘 49:1-4) 등으로 호칭하고 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과 타락한 피조물과의 사이를 아버지와 죽은 자녀의 관계로(눅 15:24), 하나님과 새로운 피조물과의 사이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요 1:12, 요일 3:1) 일컫기도 하고, 종이 아니라 자유한 아들로(갈 4:28-31), 하나님의 양자로(롬 8:15), 징계받는 아들로(히 12:5-9),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로(마 25:1), 아내로(계 10:7) 대우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 묘사는 인간 신격화의 관계나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직 영적 친밀성 개념이다. 아래 말씀과 같이,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묘사와 같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과 회복된 피조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1:13)’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이 신적 본질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12절 말씀 같이 사랑의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놀라운 권세라는 것이다(요 3:16). 즉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들 같이 대해 주시는 것이며(히 12:7), 피조물인 인간을 하나님이 양자로 삼는 사건에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하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구약과 신약에 약속된 대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증거로 알게 되는 것이다(욜 2:28-29, 행 2:38, 요 14:16).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과 아들에 대한 신앙도 오직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삼위일체 신론을 파괴하려면, 신론이나 기독론이나 성령론 중 하나만 부정하면 된다. 기독교의 신론은 이슬람 신론과 같이 아들을 부인하고 아버지를 부인하는 유일신론 신앙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성경은 이러한 파괴적인 영을 ‘적그리스도’라 가르친다(요일 2:22).
기독론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예수론과 같이 아들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동정녀 탄생’만 시인하여 예수의 피조성을 주장하면 된다. 성경은 이러한 영을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가르친다(요일 4:2f.),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도케티즘 역시 기독론을 왜곡시킨다. 성령론을 부정하려면 ‘하나님 자신의 영’인 성령을 부인하고, 성령을 일종의 피조물로 왜곡시키는 이슬람교의 영이나, 기(氣)와 같은 범신론적인 영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3. 내부자운동 번역 성경의 신 명칭
우리는 무슬림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내부자운동’의 성경 번역이, 장차 ‘꾸란적 신앙’을 불러들이지 않을까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내부자운동 지도자 마즈하르 말루히가 번역한 아랍어 번역 성경 ‘The Correct Meaning of the Gospel of Christ(Dar al-Farabi, 베이루트, 레바논, 2008)’에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단어가 없다.
마 5: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너희의 최고 수호자이신 하나님”으로,
마 5:45: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수호자들”로,
마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가장 높으신 하나님”으로,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를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같이”로,
눅 11:13: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를 “세상의 주께서”로,
눅 22:29: “내 아버지께서”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로,
눅 22:42: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을 “오 주여… 당신의 뜻이어든”으로,
눅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를 “오 주여, 내 영혼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로,
눅 24:49: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를 “내가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로,
마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를 “하나님과 메시아와 성령의 이름으로”로.
위에서 보듯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모두 빼고, 꾸란의 반삼위일체적 신 개념으로 대체한 것이다.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가 동의하는 벵갈어 번역성경 『사도들의 삶』과 『선지자들의 삶』과, 이라크 방언의 <예수 영화>에서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삭제되고, 하나님 아버지는 알라로,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로 대체된 사실들이 발견된다.
말루히가 이렇듯 성경의 구원론적 신 명칭을 임의로 조종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삭제한 것은, 기독교 역사 이래 없었던 ‘반역적 번역’으로 판단된다.
내부자운동 지도자들이 성경 내용을 무모하게 고치면서, 점차 세계 심판자인 하나님의 아들(요 5:22)을 알지 못하게 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하나의 실수가 아니라 무서운 죄악으로 보인다.
요한일서 4장 15절에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성경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자의 구원은 약속되지 않았다. 내부자운동 지도자들이 내부자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상태로 버려두면 그들의 구원은 보장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성경 말씀을 기록하는 목적을 “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이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고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의 한 단어 한 단어가 지니는 지극히 심오한 뜻을 경히 여기고,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의 칭호를 성경에서 제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성경 번역 역사상 지금까지 성경 내용을 고치거나 빼거나 더한 것은 이단을 제외한 정통 기독교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현대 고등문서비판이 연구한 필사본 연구들은 빠진 절이나 삽입구 같은 문제를 제기했으나, 복음의 내용은 변한 적이 없고 그 영향은 극히 미미하고 메시지가 상충되지 않으며 보충적이다.
지금까지 모든 성경 번역가들은 항상 성경 사본들에 충실한 번역을 위해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온 힘을 다해 번역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번역성경으로도, 어느 지역 언어로도, 다 함께 같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데 모순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무슬림들이 내부자들의 번역 성경을 읽게 되면, 이미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들에게 신성모독죄를 씌우면서 핍박해 왔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성경을 왜곡하고 변질시킨다’고 증명하지 않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