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1) ‘레버넌트’, “복수는 나의 것”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저자 이영진 교수님의 '기호와 해석'을 연재합니다. 이 책에서 교수님은 주요 신학자와 철학자 12인의 '주제'들을 여러 영화와 접목시켜 풀어내는 참신한 시도를 했는데요. 2월부터 성경적인 '기호와 해석'론을 펼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비(非) 기독교인 학생도 함께 들을 수 있는 기독교 인문학 강좌를 하나 구상하면서, 영화 <아바타>에 관한 리뷰를 '개혁·변화…'라는 키워드와 함께 그 강좌의 과제로 낸 적이 있다. 한 기독교인 학생이 맡아 해 왔다.
내가 이 학생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리뷰 내용 때문이다. 그 학생은 우선 아바타에 등장하는 나비족은 사악한 샤머니즘 집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같은 미신과 우상숭배 사상은 개혁·변화의 대상이며, 아울러 그런 해악을 끼치는 영화는 봐선 안 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 발표를 들으면서 '아닌데… 아닌데…' 하고 있던 나머지, 그만 이 영화의 나비족은 실제 미국의 인디언들이며 그들이 사는 행성은 난개발로 점령당한 그들의 땅 아메리카 대륙을 상징하고, 특히 그렇게 점령했던 백인들의 주된 종교가 기독교였기에 그 행성의 성산(聖山) 이름이 '할렐루야'였다는 지적을 쏟아붓고 말았다. 그러자 학기말 그 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란에는 이런 말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편파적인 종교관이 아니어서 좋았습니다만 역시 비진리여서 안타까웠습니다. 더 늦기 전에 진리를 만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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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도식적 연출과 편집 때문에 망쳐버린 듯한 영화 레버넌트를 보고 나도 평점 7점 이상(10점 만점)은 줄 수 없었지만, 관람 후 줄곧 몇몇 장면이 잊히지를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력 덕택이겠지만, 자꾸만 저 아바타의 맥락과 중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 인디언 같은 백인, 그리고 큰 사슴
아바타의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용병으로 나비족에 잠입했다면, 레버넌트의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인디언 여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면서 그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아바타의 제이크가 나비족 학살에 분개해 전향한 나비족 전사가 되었다면, 레버넌트의 글래스는 자기 가족을 학살한 백인 장교를 살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바타의 백인들은 희귀한 광물을 탐내 그 땅에 발을 들여놓은 반면, 레버넌트에서의 노다지는 은금 광물이 아니라 모피다. 모피, 동물의 가죽. 이 영화의 도입부는 그래서 동물의 가죽을 벗기느라 피로 흥건한 풍경, 그리고 한쪽에서 주인공 글래스가 큰 사슴을 사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2) 죽음, 그리고 회색 곰
이 영화는 알려진 대로 19세기 초 휴 글래스(Hugh Glass)라는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사냥꾼이던 실존 인물을 용병들의 첨병 또는 안내자로 각색한 이 영화에서, 글래스는 홀로 수색을 나갔다가 회색 곰을 만난다. 뼈는 물론 온 몸이 걸레가 되도록 찢기는 사투 끝에 곰을 죽이고 겨우 목숨만 건진다.
미국의 어떤 아마추어 평론가가 이 곰에게 글래스가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루머를 퍼뜨리는 바람에 시끄러웠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곰이 죽은 척하는 글래스를 쳐다보는 정지 장면에 대한 오해일 것이다. 글래스를 죽이다가 말고 새끼 곰들을 살피고 돌아오는 그 곰은 분명 암컷이었다. 이 곰을 유의하여 볼 것은, 앞서 등장했던 큰 사슴과 다음에 나올 '말'과 더불어 긴밀한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3) 곰 가죽을 뒤집어 쓴 사람, 그리고 말을 탄 자
죽어가는 글래스를 더 이상 데리고 갈 수 없게 되자, 인솔 장교는 마치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과도 같이, 죽어가는 글래스를 (자연사할 때까지) 돌봐 주고 돌아오는 자에게 부비(浮費)를 더 지불하겠다고 제안한다. 그 제안에 용병 피츠제럴드가 소년 브리저와 함께 자원해 남았다. 그러나 글래스가 자연사할 때까지 돌봐 주겠다던 피츠제럴드는, 글래스의 아들 호크를 살해하고 글래스를 생매장한 채 브리저를 데리고 부대로 내뺀다. 그러고는 돈도 다 받아 챙겼다.
사지를 움직일 수없는 상태에서 아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글래스는 생매장당한 땅 속에서 강인한 정신력으로 기사회생하여, 자신이 죽인 회색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발을 목에 건 채 추위와 굶주림을 버텨낸다. 마치 야생 곰이 된 듯 날 것의 물고기로 허기를 채우던 그는, 어느 날 포니(Pawnee)족 인디언 한 사람과 마주친다.
흰색 점박이 무늬 말을 타는 그 인디언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들소 고기를 날것으로 먹다가 글래스에게 한 덩어리 던진다. 옆에 활활 타오르는 불이 있는데도, 글래스는 그 사람이 하는 대로 구토가 나는 그 날고기를 씹어 먹으며 유대감을 느낀다. 생식을 가르친 이 인디언은 부상이 깊은 글래스를 말에 태우고 가다 큰 눈보라가 닥치자, 천막을 세우고 그 안에 뜨거운 돌을 집어넣고는 마치 사우나처럼 만들어 밤새 글래스의 생명을 지킨다. 이러한 생존 방법을 가르친 그 인디언은 글래스와의 대화 중 이 영화에서 핵심이 되는 한 마디를 불쑥 던진다.
"Vengeance is God's Hands(복수는 신의 것이야)."
자신의 가족도 수(Sioux)족 인디언에게 학살당했다는 그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는, 복수의 칼을 가는 글래스에 비하면 나약한 패배자의 말이지 어떤 용자(勇者)의 말이 아니었다. 그 인디언은 정말 나약하게도 잠시 후 목이 매달린 채 발견된다. 프랑스인 백인들이 죽여 나무에 달아 놓고 간 것이다.
그의 목에 걸린 팻말에는 프랑스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On est tous des sauvages(우리는 모두 야만인이다)."
(4) 다람쥐 신, 그리고 그 신을 먹는 자
인디언의 목을 나무에 매달아 걸고 "우리는 모두 야만인이다"라고 모욕한 것도 백인, 곰을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거두고 부비를 들여 돌보게 했던 장교도 백인이었지만,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백인이 바로 피츠제럴드(톰 하디)다.
그는 마치 사이코패스와도 같다. 돈을 사랑해서인 것 같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용병 부대를 즐겨 찾아다니는 것으로 볼 때 살인을 즐기는 것도 같다. 그가 글래스를 지키기 위해 함께 남았던 어린 브리저(월 폴터)와 모닥불 앞에서 나누던 대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피츠제럴드의 아버지 이야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사냥 중 조난을 당해 굶어 죽기 일보 직전, 통통하게 살이 붙은 작은 다람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피츠제럴드의 아버지는 그 다람쥐를 마침내 '자신을 찾아오신 신'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고 아버지는 그 신을 먹어버렸다고 피츠제럴드는 말했다. 그때부터 그것이 피츠제럴드의 신관(神觀)이 되었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특정된 악인이라기보다, 서구 문명을 접하는 우리 모든 현대인의 표상이다.
나는 사실 과거 그 강의에서 '아바타'를 분석해 보며, 백인은 인디언에게 무조건 사죄해야 한다고 몰아붙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모닥불에서 자신의 신관을 펼치는 피츠제럴드를 보면서, 나름대로 치열했던 아메리카 대륙 '개척자'들의 권리를 재고하게 되었다.
사실 '영토'는 국가가 정립되었을 때의 개념인데, 인디언에게 무슨 나라 개념이 있었겠는가? 사람의 머리도 짐승의 가죽처럼 벗기는 미개한 땅은 개척의 대상임이 마땅하지 않은가……. 게다가 퓨리턴들도 그 정도 고생했으면 자격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기호는 그렇게 단순한 정당화에 머무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미개한 토템(사슴, 곰)과 명철한 이신론(다람쥐)의 혼재 속에서, 진리란 어떻게 역류하는지에 대한 궤적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5) 말의 배에서 나온 자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머리 가죽도 인디언에 의해 반쯤 벗겨졌지만, 그 역시 사람의 머리 가죽을 짐승처럼 벗겨내는 야만인이요 모두의 원수다.
이 악한 원수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 글래스가 다시 만났다. 피츠제럴드는 이미 선한 사마리아인 같았던 용병 장교까지 살해하고 그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난 터다. 도끼를 든 글래스와 칼을 든 피츠제럴드의 선혈 낭자한 혈투가 흰 눈밭에서 벌어졌다.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칼끝이 다리 근육을 뚫고 들어오는 혈투 끝에, 결국 글래스는 피츠제럴드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다. 마지막 한 획이면 혼혈 아들 호크의 복수, 선한 사마리아인 장교의 복수, 생매장당했던 자신의 복수까지 다 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글래스는 나직이 한 마디 내뱉으며 피츠제럴드를 시냇물에 떠내려 보낸다.
그 한 마디는 바로,
"Vengeance is God's Hands(복수는 신의 것이야)."
시냇물 저 아래쪽에서는 백인들을 추격하던 인디언족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글래스와 무언의 교감 속에 피츠제럴드를 인계받은 인디언은, 그 자리에서 즉시 피츠제럴드의 머리 가죽을 벗겨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동물들, 곧 '큰 사슴', '회색 곰', '흰 점박이 말', 그리고 '다람쥐'는 중요한 관계를 잇는 기호로 작용하는데, 그 긴밀한 관계는 마치 피츠제럴드를 흘러내려 보낸 시냇물처럼 중요한 의제 하나를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①인디언의 토템(이것은 그들의 신이다) 가운데 하나인 큰 사슴을 사냥한 글래스 ②그 보복이라도 당하듯 회색 곰의 습격을 받은 글래스 ③회색 곰 껍질을 입고서 복수의 칼을 가는 글래스 ④죽은 인디언의 흰 말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글래스
이 기호의 이행을 따라 변화해 가는 글래스와 더불어 운반되어 온 의제란 바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
-는 텍스트인 것이다.
로마서 외에도 히브리서, 특히 마태복음에서 폭넓은 의제로 작용한 이 말씀은, 본래 신명기 법전에 본위를 둔(신 32:35) 신명기 코드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퓨리턴들이 쥐고 있었을 성경의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것은 정경 이상의 정경 코드인 셈이다. 그런데 이 텍스트가 글래스를 통해 인디언의 흰 말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변화 상태 속에서-그것은 세례에 상응하는 것이다-더 잘 본질에 부응한다는 사실이다.
"Vengeance is God's."
다시 말해 우리는 이 본문을 두 개의 갈래에서 비롯된 본문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갈래의 텍스트는 정경 코드이기 전에(정경 외적으로), 복수할 힘이 없는 이방의 모든 종족에게 분여된 텍스트로서 먼저 임한다. 왜? 인디언의 입에서도 이 말이 튀어나왔으니까.
그리고 다른 한 갈래로는 지금 정복자(혹은 개척자)의 정경이 된 텍스트로 우리가 맞닥뜨린,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경으로서 그 텍스트는 도리어 죽은 인디언의 흰 점박이 무늬 말의 배 속에 들어갔다가 나옴으로써(그것은 일종의 born again 또는 baptism), 더 온전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지닌 최종적 기호이기도 하다.
퓨리턴의 후예들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피츠제럴드의 '다람쥐 신'으로 대변된 '이신론'으로 점점 흐른다는 점에서, 이 해석학적 역류가 주는 교훈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신론에 경도된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이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미개하다고 경멸하면서도,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동시에 그 누구보다 자신을 숭배함으로써 어린양을 한낱 다람쥐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참고로 피츠제럴드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남자의 허망한 몰락을 다룬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이름이다. 미국은 이 문학을 자존심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6) 기호와 해석
이상으로 '기호와 해석'에 대한 첫 회분으로 <레버넌트>의 대략적인 기호들을 찾아내고 그 해석을 마쳤다. 그러나 이 영화의 아쉬운 완성도를 감안할 때, 여기 열거한 모든 기호가 감독에 의해 설치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기호와 해석'이라는 분야의 전거이기도 하다.
기호라는 것은 원저자들이 꾀하는 숨은 의도로 작품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사실 진정한 기호는 이와 같이 원저자의 의도된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원저자인 감독 스스로 자신이 만드는 작품의 기호가 무엇인지 실체에 좀 더 근접했더라면, 아마도 '레버넌트'(망령)라는 복수활극 제목보다는 '렘넌트'(살아남은 자)와 같은 기품 있는 제목으로 달아놨을 것 같다.
크리스천투데이에 이 '기호와 해석' 연재를 부탁 받았을 때 덜컥 수락은 했는데, 이 분야를 1-2주에 하나씩 연재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제약이 있다. 필자에게 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우선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만한 양질의 작품들이 과연 1-2주에 하나씩 나와 주느냐 하는 문제다. 요즘 같이 좀처럼 작품 만나기가 어려운 때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후에 연재되는 연속물은 최근 개봉작 뿐 아니라 기억해둘 만한 과거 상영작 또는 책·고전, 혹은 최근의 이슈, 그 외에도 우리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접하는 기호,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을 담아보려고 한다. 다소 고될 수 있겠다 싶지만, 독자와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가 된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필자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하여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는 신학자다. 최근 저서로는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