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칼럼] 이슬람 수피즘 연구 (3·끝)
3. 수피즘의 인간 신격화 신학의 문제점
위의 유신론 내지 범신론적 합일의 수피신학과 병행하며 힌두교의 요가는 범신론적 합일의 신학을, 불교는 무신론적 합일의 신학을 통해 각각 인간 절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 합일의 순간을 힌두교 철학은 범아일체를, 불교철학은 열반을 실현한 것이라고 한다.
자아는 없어지고 알라만 남게 된다고 주장하는, 신인융합을 이루려는 수피 기법들은, 힌두교가 그 범신론적 절대자 브라만과 아트만(인간에 내재한 브라만)과의 융합이나, 불교가 멸아 내지 열반이라고 하는 '무아'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요가 기법들과 그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상당히 동일하다.
힌두교의 요가는 힌두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수행 기법이고, 그 목표는 인간의 자아라는 아트만을 우주의 실재라는 브라만과 합일하기 위해 황홀경이나 최면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요가의 사상적 기초는 인도에서 가장 알려져 있는 우파니샤드(Upanishaden) 철학적 범아일체 사상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마음의 움직임을 다 멸하는 테크닉이다.
Maitrayani Upanishad는 숨 조절, 명상, 감각기관 차단, 사고기능 고정, 몰두 등과 같은 방법과 기술을 통하여 참된 자아를 깨달음으로써 브라만과의 합일을 이루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요기들은 초능력이나 마법열을 얻기 위해서 마취제나 마약, 아편, 최면제를 사용하여 의례적으로 도취하고, 요가의 거장 파탄잘리(Patanjali) 역시 엑스터시를 유도하는 마약 및 약초를 초능력 성취 수단으로 들고 있다.
19세기 불이론(不二論)적 베단타철학자로 뱅갈의 유명한 라마크리슈나(1836-1886)는 기독교까지 체험적으로 합일하고 싶어했다. 그는 1874년 11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그림을 응시하던 중 그 그림에 사로잡혔다. 그는 "문득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그림에 시선을 멈추었다. 신선한 감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응시하고 있던 형상들은 생기를 띠었고 그 얼굴에서 나온 빛줄기들이 그의 영혼 속으로 꿰뚫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오 어머니, 제게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외쳤다. 이 순간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혼을 소유했다고, 그리스도와 영원한 합체를 이루었다고 느꼈다. 이 신비 체험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 힌두교는 죄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어떤 테크닉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무신론적 자력 구원이다. 힌두교 철학은 모든 복수(단수)의 근거를 '하나'의 근원자(prima causa)에게서 발견하려는 일원론적·범신론적 사상적 체계를 지니고 있고, 그들의 '구원'이란 '복수'의 대립을 없애고 無二(不二)의 신비에 몰입하는 것이다.
힌두교의 구원 방법이 '유신론적인 합일'이든 '범신론적인 합일'이든, 그 목표는 자기 신격화 내지 절대화임을 알 수 있다. 즉 인격적인 신과 동화되든 비인격적인 브라만과 합일되든 간에, 그 내용은 인간의 본질을 절대자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신격화와 확대에 관하여 선다 싱(Sundar Singh)은 그 위험성을 직시하고, 창조에 속해 있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기를 신화(vergottet)했다고 지적했다. 참 구원이란 자기를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멸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이기심(Selbstsucht)을 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기적 자아'가 하나님께 대항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고, 그 결과 "마지막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선다 싱은 "자아에 대한 기독교적인 자기 긍정은, 힌두교의 신격화한 자아에 대한 부정"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불교의 요가는 열반에 도달하려는 테크닉이다. 열반이란 "바나"(불다)에 "니르"(부정사)가 붙어 있는 단어이며 "불어서 끈다"는 동사이다. 즉 번뇌의 불꽃을 불어 꺼 버린 것과 같이 탐·진·치(貪·瞋·痴)와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지고, 일체의 고통(苦)에서 벗어난 상태다. 이를 멸(滅)·적(寂)·적멸(寂滅)이라고 한다.
열반은 생존 시 열반과 죽음에 의한 열반이 있어, 전자를 불완전한 열반, 후자를 완전한 열반이라 칭하고, 석가모니의 죽음을 입멸(入滅)이라 한다. 입멸은 등잔불을 끄듯이 괴로움을 느끼는 감각기관과 의식을 완전히 멸한 상태이다. 독일의 M. Winternitz는 이 열반을 "강경중적 마비(Kataleptische Starre)"로, A. Forke는 "완전 최면(vollstäntige Hypnose)" 상태로, D. T. Suzuki는 "영적 자살(geistiger Selbstmord)"로 각각 해석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열반에 이르는 수행법 '8정도'의 마지막 단계인 '정정(正定)'과 같이, 수도자가 최후의 삼매(samaj)를 준비하는 단계로써 모든 감각과 의식을 끊어 분별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때 마음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머물러,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더 이상 생각과 상상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적멸(寂滅)이다. 일체 의식과 지각이 멈춘 상태(滅盡定)이다.
그러나 요가 수련 중에 황홀경이나 최면에 빠지기 쉬우므로, 촛불을 이용해서 의식을 일깨우며 위치 바꿈을 하기도 한다. 숨(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면서 대상물에 의탁하여 코끝→심장→배꼽으로 옮겨가며 몰입한다. 이때 세계를 실체로 보는 의식이 점점 약해진다. 이것이 열반에 도달하는 길이다.
원효(617-686)의 통불교적 중심 개념도 역시 "일심"이며, 그도 일심을 불성과 동일시하였다. 이기영은 원효의 "일심"을 "포괄자" 또는 "무이"라 하며, 주체와 대상이 구별되지 않은 하나의 마음 또는 전체의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본래 다르지 않다(일심동체)는 말이다.
원효는 일심을 "무소유"라 하여 "머무는 곳이 없는 것"으로 설명하며, "일심"은 모든 지식과 개념과 의미를 멸함으로써 달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열반"이며, 이 상태를 "멸아"라고 한다.
D. T. Suzuki는 사람의 마음이 '공'한 상태가 불성의 상태이며, 주체와 대상이 통일된 상태가 열반이라고 한다. 중국의 고승 황벽이 "나는 절대자 안에 거하고 절대자는 내 안에 거한다", "나는 절대자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인간을 신격화한 상태가 바로 열반이고 일심이다.
힌두교가 자아와 우주와의 합일을 추구한다면, 불교는 인생의 고(苦)에서 탈출하려는 무신론적 현실 해결주의에 기울었다. 또 힌두교가 3억 3천의 신을 숭배한다면, 불교는 처음부터 철저한 무신론이다. 그것은 속죄의 사실과 역사적 근거를 가진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와 업보에서 스스로 탈출해야 하는 자력 구원관이다.
불교는 원죄와 창조론을 거부하는 무신론 종교이기 때문에, 구원자도 구원도 없다. 불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아를 찾는 종교로서 철저한 무신론에 빠지게 되어, '참 자아'라는 '무아'를 실현하고 또 그것과 동일시하는 무신론 형태의 자기 절대화를 추구하는 종교다. 불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회개도 용서도 구원도 천국도 없는 무신론 종교다. 이들의 구원이라는 해탈 또는 열반의 상태란, 참다운 구원이 아니라 그들의 말 그대로 '멸아'이다.
결어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세마잔들의 합일의 신비 체험에는 큰 위험이 동반한다. 첫째로 알라와의 합일신학이나 무아지경의 체험에는 인간 신격화의 신학이 전제되어 있어, 꾸란에 의하면 신성모독에 해당된다. 둘째로 세마잔들이 알라라고 하는 그 대상은 참 알라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세마잔이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 대상에 대한 어떤 저항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수피가 어떤 대상을 접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메블라나 종단 수피들은 회전무에 의해 도달하는 곳에서 만난 대상을 무조건 알라라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영 분별 문제에 관한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슬람교와 꾸란에 영 분별이나 거짓 영 내지 거짓 선지자 개념도, 영 분별 신학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창립자들과 이단 설립자들, 샤먼들도 마찬가지로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 이슬람의 수피들은 오직 신비 체험을 진리의 기준으로 여긴다. 그러나 인간의 체험은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회전무를 통해 무아에 이르려는 수피즘이나, 요가를 수행하여 브라만과 융합하려는 힌두교나, 요가를 수행해서 열반에 들어가려는 불교가 모두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는 원인은, 그들이 창조주를 부인하고 자기를 신격화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부해서 항상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테크닉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다. 사실 인간의 죄성을 수피즘이나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깊이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죄악과 죄성 때문에 실행된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 변화되지 않고는 천국을 기대할 수 없으며, 용서받지 못한 죄를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는 사람 역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죄악도 스스로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죄 용서 없이 구원은 불가능하며, 구원을 이슬람교의 회전무나 힌두교나 불교의 요가행위 같은 테크닉에 의해 획득할 수 없다. 성경적으로는 오히려 위와 같은 수피즘의 신인융합 사상이,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타락한 아담의 욕구과 병행되는 가장 큰 죄악으로 판정된다(창 3:5).
참된 신앙적 신비는 오직 기독교 안에 있다. 오직 대속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회개하는 이에게 체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은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하나님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행 2:38), 그 때부터 성령은 우리에게 내주하시고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하며(요 14:16)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고후 13:5, 요 3:5). 성령을 받은 사람이 기도나 예배 중 자아를 소멸하는 법이 없다.
성령은 한 번 강림하면 그 영혼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계신다(요 14:16). 성경은 성령(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계시는 영혼만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한다(고후 13:5).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요 3:5).
이 사실은 참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인 체험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신비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최대의 선물이다. 성령은 결코 인간의 선행과 업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행 2:38).
/이동주 박사
선교신학연구소장, 아신대 은퇴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