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삼 목사 설교] 성령님과 친해지려면…

송경호 기자  7twins@naver.com   |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설교자 :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
날짜 : 2016년 7월 24일
본문 : 에베소서 5장 10절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님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배웠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님과 친해지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동행’이라는 말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동행을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행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동행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하여 잘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그리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그 사람이 기뻐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동행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면, 그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나를 교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도 기뻐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때, ‘친함’은 계속됩니다. 깊은 교제 가운데 기쁨이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시험해 보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시험’입니다. ‘시험해 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단순히 유혹에 빠뜨리는 시험이 아니라 ‘실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조금씩 진실에 근접하게 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생각하라’는 말도 종종 나옵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생각’하면 믿음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죠. 말씀을 준비하면서 또 하나의 명언이 나올 것 같은데, “믿음이 없는 생각은 ‘불신’이고, 생각이 없는 믿음은 ‘맹신’입니다.”

사람들은 왜 생각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생각한다는 것은 때로 피곤하고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편하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옥한흠 목사님이 성령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인용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가 쓴 「아들이여 이 산하를」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한 꼬마는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그 꼬마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밖에 내놓고 주무세요?” 할아버지는 아이의 질문을 받고 금방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껏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을 못 한 일인데 오늘 밤에 한 번 자 보고 대답해 주마”하고는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드디어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불 속에 넣고 자자니 답답하고 내놓고 자자니 이상하고 해서 밤새도록 수염을 가지고 씨름했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잘 때 그것이 이불 속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 미처 생각을 않고 있다가 그것을 의식하게 되자 그렇게 불편하더라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지 않으시나요? 그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 말입니다.

자 이제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는 노력이 누군가를 기쁘지 않게 한 경험이 없으신가요? 저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언젠가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부부를 영화 시사회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배우들도 만나는 자리고,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고. 문제는 그 영화가 공포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같이 영화를 본 사모님이 절대로 공포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이제 그분의 취향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둑을 좋아합니다. 두는 것보다는 보는 것을 말이죠. 제가 사무실에서 운동할 때면 한 시간 정도 바둑방송을 시청하며 걷는 것이 큰 기쁨이기도 하죠.

그런데 ‘신의 한 수’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저는 바둑을 상상하며 그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 역시 제가 친한 목사님 부부와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목사님의 사모님이 며칠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 영화는 조폭 영화였고, 상영시간 내내 잔인한 싸움과 피가 난무한 영화였죠. 그 사모님 역시 피를 보면 소화가 잘 안 되는 분이라, 영화를 보고 난 후 소화가 안 돼 무척 고생했죠. 그렇게 알아가고 관계가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도 과정이구나!”

하나님을 알아가고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죠. 신앙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맞춰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고 맞춰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실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 때, 아니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우리 삶의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들은 명확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늘날과 같은 성경이 없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들은 삶의 과정을 통해 경험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다양한 지식과 성경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성경을 통해서만 배워서 알 수 있다고 하면 ‘인격적’ 관계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경험과 과정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두 번째 시간에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만큼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남겨두고 자신의 길을 가던 그들과 주님이 동행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죠. 그들이 주님과 다시 동행하기 위해서는 가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 성령께서 길을 바꾸지 않으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분이 계신 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령님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거나, 성령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라면 우리의 노력은 수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참 중요한 일이죠?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임재’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님을 위해서’라는 말의 진의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임재 범위를 벗어나는 일은 결단코 성령님을 위해서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성령님께 맞추어야 하나요?

오늘 우리는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맞춰주시지 않나요? 왜 우리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나요? 켄달은 그의 책에서 몇 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맞춰야 하는 이유 말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성령님과 친해지려 할 때,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일만큼 주님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을 통해 주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에 우리가 순종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점 주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여기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는데 ‘순종’입니다.

순종이 우리의 삶에서 작동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사실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모를 때 올바른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과 목적이 분명하고 가야 할 길이 보일 때는 순종이 쉽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는 길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같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길이 모호할 때, 순종이 필요한 순간이 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여행하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지도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만일 갑자기 목적지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기를 바란다거나, 우리의 눈에 쉽게 보이는 길을 선택했다가는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그 목적지를 향해 안내하는 지도를 보는 일이고,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 길을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우리의 여행 경로를 알려주는 지도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듣는 성령님의 음성이 모호하게 느껴질 때, 그 음성이 분명한지 알게 해 주는 방향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도의 경로는 아주 무의미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의 인생에서 경로를 벗어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너무 늦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합니다. 삶에서 벗어나는 경로란, 우리의 계획이 아닌 재난과 고난을 당했을 때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개인적인 삶의 불행을 경험할 때도 경로를 벗어난 듯한 절망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서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위대한 목적을 가졌다는 것으로 이런 위기를 경험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때때로 엄청난 ‘교만’이거나 ‘자신의 의’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6장에 나오는 다윗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다윗이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왕이 된 다음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적군의 땅에서 빼앗아온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나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법궤를 메고 오던 소가 뛰므로 ‘웃사’라는 사람이 손을 들어 법궤를 붙잡았는데 죽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윗에게 있어서 화가 나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의 뜻이 좋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려 하는데 왜 자꾸 이런 장애를 만나게 되는 걸까요? 맹세컨대 다윗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다윗이 생각할 때,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감정을 다스리고 난 후에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역대상 15장 13절에서는 이 일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법궤는 레위인을 통해서만 옮기게 되었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럼 다윗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다시 그분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장 14절 이하에 보면, 다윗은 수레에서 법궤를 내려 하나님의 말씀에 적혀 있는 대로 실행하게 하고, 마침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풀리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순종하면 이유가 풀어집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령님과 친해지는 길은 유일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방법으로 구해야 합니다.

시편 27편 4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면 분노로 인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성령님과 친해지려 할 때, 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많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 죄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철저한 기준을 가지고 사는 착한 사람들이 성령님과 친해지기가 힘들죠. 참으로 신기하게도 순결하신 영으로 임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죄를 인식하는 곳에 오십니다. 죄를 인식하지 않으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베드로를 만나 부르실 때,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이었나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를 떠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부르시고 ‘동행’하셨습니다.

이사야 6장은 유명한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장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본 순간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무엇인가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런데 성령님은 그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자백을 들으시고 숯불로 그의 입술을 지져 정하게 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분명한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성령님과의 교제에서 장애물이 아니라, ‘통로’가 됩니다.

‘죄의 인식’이라는 것을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인식’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범주에서의 죄 된 ‘행위’와는 조금 다릅니다. 흔히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는 경건의 기준과 의로움의 표준이 무엇인가요? 세상의 오락을 즐기는 것, 사치하는 것, 세상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 우리는 참 쉽게 그런 것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주차장에서 얼굴을 붉히는 것, 예배시간에 자신의 경건함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는 것,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것, 자신의 의로움을 돋보이려고 누군가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것, 그런 일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님 앞에서 죄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친해진다는 것은 그분을 근심시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죄란 그분을 근심하게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죄는 사실 너무나 명확하게 우리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불편해하시면, 우리 속에 평안함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무서운 징계나 실수로 인한 고통을 당하기 전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작은 증거는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점검’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민감함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분을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이런 점검의 과정을 통해 마음의 편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 평안이란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함은 절대로 죄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성령님과 친해지고자 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더 큰 기름부음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큰 기름부음이라는 것이 혹시 우리의 이기심이나 욕심은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일어나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취한다면 분명히 그러한 갈망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죠. 하지만 이러한 갈망이 끊임없는 성령님과의 교제를 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이기심을 넘어선 성령님의 역사가 분명합니다. 지속해서 우리가 성령님께 맞추고 집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행의 기쁨이 있어서 갈망하는 것이죠.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정말 귀한 찬양이 아닌가요? 더 큰 기름부음에 대한 갈망은 내 삶의 패턴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임재를 환영한다는 의미이고,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떠나시게 하는 이유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한 갈망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을 환영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시큰둥한 반응과 “정말 환영해요”라는 말 중에 어떤 것이 좋던가요?

우리의 갈망은 성령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표현이며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이 낡은 삶의 습관이 아닐 때, 우리는 그분이 기뻐하시는 방식에 늘 마음을 열게 되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갚아야 할 부채가 있어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의 기쁨을 누리는 삶의 방식입니다.

리 스트로벨의 [은혜, 은혜,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자비’와 ‘은혜’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냥 ‘네가 한 일에 대해 너를 벌하지 않겠다’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건 자비지요. 그분은 극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것을 주십니다. 완전한 용서와 영원한 삶을 순전히 선물로 주십니다. 이건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를 부모가 그냥 봐주는 정도가 아니라 한없이 사랑하기에 아이스크림까지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의무적인 ‘동행’이 아니라, 자의적인 동행이 시작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와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종교에도 존재합니다. 불교의 문헌에도 탕자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 다 아들이 반항하여 집을 떠났다가 나중에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불교의 이야기 끝이 아주 다릅니다. 아들이 수행으로 자신의 비행을 갚아야 합니다. 결국, 25년 동안 고되게 똥을 치웁니다. 이렇게 인간의 행위로 열반에 이르는 종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행위로 갚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감’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성경에는 돌아온 아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고 옷을 입혀주고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이슬람에서는 탕자의 이야기가 불가능합니다. 탕자가 끝내 집으로 돌아올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슬람교에서 가문의 수치는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알라에게 복종하는 집안이라면 당연히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합니다. 가출하는 자녀 때문에 받는 수치란 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만약 돌아온다고 해도, 알라 앞에 납작 엎드려 큰 고행으로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나마 돌아온다면 말이죠. 분명히 탕자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가 크고 작음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스트로벨이 만났던 크레이그 헤이즌이란 착한 사람을 통해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는 너무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죠. 그런 그가 성실한 그의 삶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조바심과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을 조금 옮겨 보겠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은혜란 게 재미있는 측면이 있어요. 두어 해 후에 어떤 전도자들이 제가 다니던 대학에 왔는데, 그때 함께 온 남자들 몇이 캠퍼스의 시멘트 화분 위에 서서 극적인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들이 술에 절어 살면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는데 주님이 찾아와 건져 주셨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 나는 저기 올라가서 다른 간증을 하고 싶다.’ 저는 술에 절어 살지도 않았고 사회의 쓰레기도 아니었고,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으며, 모두들 제가 성공 가도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런 저에게도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절대자와 친해진다는 것은 무던한 노력과 더불어 부담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동행’이란 진정으로 기뻐하는 마음이면 됩니다.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무가 아니라,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기쁜 마음이면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극은 절대로 우리의 노력으로는 메워질 수 없는 것이죠.

기름부음에 대한 열망은 나의 뜻을 이루거나, 자신의 업적을 쌓으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기름 부으심의 열망이 세속적 욕망과 구분되는 것은 나의 교만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일이 될 때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죠.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에는 늘 이런 명패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의 업적으로 남을 것인지 상관치 않는 사람에게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실한 신앙의 회복이야말로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진심으로 우리가 바라는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성령님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성령님의 통제 속에 맡길 수 있지 않을까요? 성령님과 동행하는 친밀함이 주는 유익입니다. “자유함!”이죠. 로마서 8장 28절에서 말씀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과 친해지려면 그분을 따르려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지금은 그분의 마음을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동행하면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분명하다면 성령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행한 순종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시험’하는 삶을 살아갈 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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