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어떤 분이 올린 글이다. 구로구청 시절 이야기란다. 그에게 고등학교 2년 선배가 있다. 군대생활을 같은 분대에서 했고, 같은 직장에 다녔다. 선배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직장 다닐 때 선배가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기에 '미쳤다'고 했다. 박봉에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십일조는 무슨 십일조야!
그런데 한때 그런 말을 했던 자신이 지금은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고 있다는 게다. 물론 아깝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권사이자 지역장인 아내가 '십일조는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하기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드리기로 한 게다.
그런데 한 가지 유감인 게 있단다. 아내는 구태여 '총액 기준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 생각은 달랐다. "주택자금 대출금 등 빚을 제하고, 순수익에서 십일조를 내는 게 맞지 않느냐?" 그런데 아내는 '그게 아니다!'는 것이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모 장로님은 최근 십일조를 1억 5천만 원 냈다고 한다. 자신으로서는 살 떨리는 일이란다. 그런데 장로님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게다. 5억 원에 산 건물을 20억 원에 팔았다는 게다.
그런데 그 남편이 하는 말이 재미있다. "나 같으면 당연 하나님을 속여 줄여서 냈겠지요. 아니다. 당연 다 냈을 겁니다. 우리 아들이 목사 지망생인데,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아들이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세운다면 교인 중 재벌 회장님이나 적어도 중소기업 사장 아니면 저런 장로님 몇 분만 있으면 그깟 내 연금 기백은 껌값일텐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 글에 댓글이 엄청나게 달렸다. 그만큼 십일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크다는 게다. 대부분 십일조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의 글이다.
십일조 문제로 고민해 보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없을 게다. 더구나 배우자나 가족이 믿지 않을 때 갈등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꼭 내야 하는가?" "총수입의 십일조를 내야 하는가? 실제 생활비의 십일조를 내야 하는가?" "빚을 지고 있는데도, 십일조를 내야 하는가?" "십일조를 꼭 본 교회에 내야 하는가?" "실직해도 십일조를 내야 하는가?"
십일조는 성도에게 갈등을 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이런 저런 이유들을 둘러대는 것도 사실이다. 때로는 십일조 때문에 신앙 양심의 가책을 갖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단들이 십일조를 갖고 기성교회를 공략하기도 하고, 몇몇 교회는 아예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회'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자랑스럽게(?) 목회한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경제 문제로 가정이 파탄이 되고 이혼하게 되었는데, 그 해결책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는 상담편지를 일 년에 수백 통씩 받았다. 그럴 때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첫째, 돈을 남용하지 말라. 둘째, 기도하는 마음으로 물건을 사라. 셋째, 서로 딴 주머니를 차지 말라는 등 열 가지를 쭉 열거하다, 맨 마지막에 가장 큰 글씨로 말라기 3장 10절의 말씀을 적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십일조에 대해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위대한 신앙인이면서 큰 재산가였던 알렉산더 귀르도 이렇게 간증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보라. 여러분의 가계부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손 떨리는 일일지 몰라도,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어느 목사님이 자신이 섬기는 교회 안수집사님에 대한 간증을 했다. 예전에 집사님이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0-12)."
집사님은 일 년 동안 십의 일조가 아닌 십의 오조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했고, 정말 변화가 있는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지는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1년이 지나는 동안 정말 물질의 부족함이나 어려움을 모른 채 평안 중에 지냈다. 그래서 집사님은 고백했다.
"월급의 반을 드리면서 이는 당연히 드리는 것으로 여겨졌고, 십의 오조를 드리고 있다는 부담감 자체가 없었습니다. 1년을 결산하던 때에 깜짝 놀랐습니다. 첫 번째로 시간을 좀먹던 황충을 없애주셨습니다. 당시 내 주위 부자 친구들이 내게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도움 받아야 할 사람은 나인데, 부자들은 내게 도와달라고만 했습니다.
부자들의 특징을 그때 알았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와달라고만 하고 자기를 도와줄 사람만 찾는다는 것이죠. 즉, 자기가 도와줘야 될 사람은 아예 만날 생각도 없다는 것입니다. 돈 되는 일이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돈 안 되는 것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나는 돈 되는 일도 아니면서 부자 친구들에게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도와주는 것이 자랑스러웠나(?) 봅니다. 친구들 모임, 쓸데없는 곳에 대한 관심으로의 시간 낭비 등등 결국 항상 시간에 쫓기어 정작 내 할 일을 못하게 되었던 것을 전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을 버리게 하는 황충을 없애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점차 물질의 황충도 없애주셨습니다. 집 문제도 해결해 주셨고, 필요한 것 하나하나 주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한 재미난 예를 들면, 큰 아이의 경우 십의 오조를 드리던 당시 1만 원짜리 오즈의 마법사 영어 테이프와 책을 사주었는데, 거의 천 번을 듣고 그거 하나로 영어듣기를 고교까지 최우수성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니 주위 돈 많은 지인들이 매월 수백만 원 들여 과외를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쓸데없이 돈이 지출 되는 것을 막아주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월급의 반을 드리고 반으로 생활하려면 부족하고 모자라야 함에도, 하나님께서 조금도 부족함 없이 채워 주셨습니다. 쓸 것 다 쓰고도 부족함이 없었고, 그렇게 편안히 1년을 지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직접 눈으로 보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십일조는 복을 주시기 위한 통로로 나에게 허락하신 귀한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늘 고백합니다. 감히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창조주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말라기 3장 10절 말씀에 힘입어 십의 오조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셨음에 감사드리며 귀한 체험을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환경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집중하고 순종하는 삶이다. 그때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을 간증하는 스릴을 즐기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