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사건은 이미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5월 21일. 인천에 있는 어느 공원 노상 주차장에서, 불에 탄 승용차 안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 오자, 범인은 같은 해 6월 3일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건이 자신의 단독 범행인 것으로 진술했다. 결국 그는 10월 25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른바 인천 호프집 여주인 강도 살인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9년 만에 사건에 반전이 일어났다.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범인이 사건의 진실을 실토한 게다. 그로 인해 사건의 주범이 따로 있었음이 드러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감옥에 갇혀 있던 범인은 주범으로부터 옥바라지를 약속받고 혼자 총대를 멨다. 그런데 범인이 수감 생활을 한 지 2년 만에 주범이 연락을 끊어버렸다. 약속을 어기고 배신한 게다. 그러니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겠는가?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게다가 오랫동안 진실을 감추어 오다 보니 마음으로 무거운 죄책감에도 시달렸다. 그래서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고통까지 겪어 왔다. 그러면서 마음에 결심을 내렸다. "사건의 진상과 공범을 밝혀 마음 속에 남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겠다." 그리고 옥중서신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결국 검찰은 재조사를 실시했고, 사건의 진위는 다 드러났다. 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2007년 5월 21일 오전 1시 30분쯤, 주범 A씨는 감옥에 갇힌 B씨와 공모해 호프집 여주인에게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호프집 여주인을 밖으로 유인했다. 이들은 여주인의 차량을 운전해 시흥시에 있는 어느 공터까지 갔다. 이들 두 사람은 여주인을 구타하고 신용카드를 빼앗았다. 그리고 과도로 목을 두 차례씩 찔러 살해했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차량에 불을 질러 차량 안에 있던 시신마저 불태웠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9년 만에 진실은 드러났고, 주범도 체포되고 말았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신용카드가 목적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선택을 잘못 했다. 어떤 명분으로도 사람을 해롭게 하고, 더구나 생명까지 앗아가고, 그것을 숨기려고 차에 불까지 낸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애초에 마음에 악한 마음을 허락한 게 잘못이다. 원초적으로 허락해서는 안 될 마음이다.
한 사람이 판단을 잘못해서 불의한 일을 제안했을지라도, 함께 손을 잡고 악한 일을 도모하지 말았어야 한다. 말리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공모를 하다니.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옥바라지를 약속받고 혼자 책임을 떠맡더라도 사건이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을 해놓고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배신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비밀로 간직하고 숨기려 했지만, 결국 만천하에 드러났다.
인생에 선택은 중요하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운명이 달라지고, 인생의 향방이 달라진다. 불행하고 비참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야 없겠지만, 정작 불행하고 비참하게 되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복을 불러오기도 하고,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선택도 있지만, 누리던 복을 차버리는 선택도 있다.
다윗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들은 선택하는 것이 다르다고 한다(시 1:1-2). 물론 이들의 결과도 엄청나게 달라진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 그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다.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의 길을 찾아봐야 한다. 그들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함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앉을 자리와 설 자리를 잘 분별해야 한다. 생각과 길, 자리를 잘 선택하지 않으면 불행을 초래한다.
대신 의인들이 선택하는 것은 다르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기쁨이요 소원이라는 게다. 뿐만 아니라 의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종일, 아니 일평생 중얼거리며 살아간다. 마음에서. 생각에서. 입술에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사람들의 명단이 많이 나온다. 아담과 하와는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인류에 불행을 불러일으켰다. 가인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아우인 아벨을 죽여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아간은 불의한 재물을 탐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가 화를 초래했다.
가룟 유다는 돈 때문인지, 기분 상한 게 있는지 사단에게 생각을 빼앗겨 스승을 팔아넘겨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가져왔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의 종 베드로를 속이고, 성령을 속여 죽음을 맞았다. 열 명의 정탐꾼은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앙의 길을 선택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선택하여 위대한 민족 지도자 모세도 들어가지 못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중요하고 큰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사소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선택이든 사소한 선택이든, 그 선택이 모여 내 인생과 운명은 결정지어진다. 그래서 순간 순간 지혜로운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 부잣집에 결혼식이 있어 음식 장만을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주인은 자기 집에 있는 동물을 불러 모아 특별회의를 열었다. "이번 결혼식에는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큰 잔치를 베풀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동물들은 입을 모아 '좋다'고 일제히 대답했다. 주인이 동물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번 요리의 재료로 거위를 결정하겠습니다." 그러자 거위는 새파랗게 질려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큼직한 알을 낳아 이 집에 늘 도움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나를 잡습니까? 저기 있는 암탉을 잡으세요."
그러자 깜짝 놀란 암탉이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나는 아침 일찍부터 날이 밝았음을 알려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는데, 저기 시원찮은 양이 있으니 저 녀석을 죽이시지요." 회의에 참석한 모든 동물이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자는 안건에는 찬성해 놓고, 실상 음식의 재료로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하나 같이 피할 궁리를 하며 도망가기 바빴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일이다.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을 게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다. 애초부터 불리한 선택을 하셨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포기하고 세상으로 오셨다. 하나님이시면서 죄인들의 종이 되어 섬기셨다.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건만,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누가 봐도 좋지 않은 선택이요, 불행한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위대한 일을 이루셨다. 생명을 주는 길, 천국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여셨다. 어쩌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선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