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12] '벤허'는 어떤 왕자인가
<벤허> 2016년 리메이크 버전에서 가장 도드라진 변화는, 대체로 1959년 판과 달리 예수님 얼굴이 속시원히 등장했다는 점을 꼽는 것 같다. 그러나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뇌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은, 예수님의 얼굴보다는 자막 속에서 벤허를 부르는 호칭 세 글자, 즉 '왕자님'이었다. 아니 거슬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과연 1959년 버전에서도 벤허를 왕자님이라고 불렀던가?'라는 생각에, 관람 후에도 그 호칭이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았았다. 왜냐하면 당대 로열 패밀리라고 하면 두 종류 밖에 없었는데, 쓸 만한 가문은 다 선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세세한 리뷰보다는 벤허와 같은 당대 유대인 특권층의 형성 과정을 약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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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헬라화
유럽화하다(Europeanize), 미국화하다(Americanize), 일본화하다(japanize)... 라고 쓸 때,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어미가 있다. '-ize'인데, 이 접미사의 유래는 희랍어 -ίζειν이다. 그리고 그것은 '앉다'는 뜻을 가진 ἵζω에서 왔거나 '생계'를 뜻하는 ζειν 또는 ζάω(사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를테면 사도행전 6장 1절에 히브리파에 대항된 '헬라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 헬라파로 번역된 헬레니스테스(Ἑλληνιστής)는 헬레니제인(Ἑλληνίζειν)에서 온 말이다. 즉, '헬라화' 된 유대인을 뜻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헬라화'를 당하게 된다. 첫 번째는 알렉산더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두 번째는 로마 제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가 마케도니아 출신 그리스 사람 알렉산더를 애송이라고 얕잡아 봤다가 대파당한 후 벌금까지 물게 되면서 알렉산더는 세계 패권에 도전하는데, 이것이 첫 단계 헬라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323년 그가 갑자기 죽자 그의 네 부하들이 땅을 나누어 차지하면서 팔레스타인 땅의 헬라화는 본격화되었다.
(2) 1단계 헬라화
유대인들이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게 된 지배자는 셀류코스였다. 알렉산더 생전 네 명의 장수 중 하나인 프톨레미의 부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프톨레미의 후광으로 바벨론과 코일레 시리아 북부를 차지함으로써 유대인 통치를 시작했다.
일부 유대인은 셀류코스 왕조를 반겨 맞았다. 그 이유는 통치 초기에 토라를 유대인의 법으로 인정하고 자치권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세금을 3년이나 유예해 주었고 3년이 지나서는 모든 종류의 세금에 3분의 1을 감면해 주되, 특히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면세 혜택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분위기가 깨진 것은 안티오쿠스 4세라는 인물이 들어서면서였다. 스스로를 '신의 현현(에피파네스)'이라고 참칭했던 그는 자신의 영토 내 헬라화에 있어 제일 큰 방해 요인인 유대교의 정체성을 아예 없애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헬라화'라는 것은 일종의 '문화화'로 여겨졌는데, 이 문화화라는 이름으로 히브리어 성경 필사본들은 불태워졌으며, 돼지고기를 거부하는 율법사는 맞아죽는 일도 생겼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서 유대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헬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세계와의 교역을 적극 시도하는가 하면 헬라의 오락도 기꺼이 즐기는 친(親)헬라파 세력,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든 헬라적인 것을 전면 타파하고 헬라 통치자들과의 타협을 철저히 거부하는 세력이었다. 이런 와중에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모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제 유대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항쟁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우리는 이 항쟁을 바로 마카비 항쟁이라 부른다.
안티오코스가 보낸 사절단이 당도해 유대인들로 하여금 헬라의 신들에게 제사를 바칠 것을 명령했는데, 어떤 유대인이 제사를 거행하자 하스모니아 가문 중 일원인 맛다디아가 그 유대인을 제단 위에서 그대로 칼로 죽이고 사절단도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 그 발단이 되었다. 장본인 맛다디아는 다음해에 죽었지만, 그 군대는 해산되지 않고 그의 아들 중 가장 용맹스러웠던 셋째 아들 마카비가 지휘관이 되고 유대교 경건주의자(하시딤)들도 합류하면서, 단순한 저항을 넘어 안티오코스 군대에 의외의 승전을 거두어 나갔다. 거듭되는 승전으로 기세를 얻은 유대인이 아라크 요새만 빼고 예루살렘을 수복해낸 것이다.
이 마카비 항쟁이 발발한 것은 예수님 오시기 167년 전의 일이며, 예루살렘을 수복하여 성전 정화를 한 해는 164년, 그러니까 마카비가 힘겹게 싸운지 3년 뒤에 이룬 성과였다. 마카비라는 말은 '망치'라는 뜻으로 그의 별명이었고, 마카비의 본명은 바로 유다였다. 그런데 유다는 항쟁이 일어난 지 7년만에 벳 호른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리고 마카비 유다의 뒤를 이은 것이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이다. 그는 셋째 형 유다에 못지않은 유능하고 현명한 지휘관이 되었다.
요나단은 안티오코스 가문(셀류코스 왕조)이 내부 정쟁에 빠진 것을 이용하여, 라이벌 관계에 있는 측과 동시에 조약을 맺는 등 정치력을 발휘하여 양쪽 사이에서 줄을 탔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리어 경쟁적으로 유대에 화친을 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 접경에 있는 시리아 주둔군을 자진 철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로부터 대사제직을 부여받는가 하면, 시리아 지방장관으로까지 공식 임명을 받는다. 이것이 하스모니아 가문이 대사제직을 이어받게 된 유래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시리아 권력 내부의 캐스팅보드 역할을 하던 요나단은 안티오코스 6세의 섭정을 하던 디오도로스 트리폰에게 살해당한다. 그러자 맛다디아의 아들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던 시몬이 요나단의 뒤를 이어받았다. 시몬은 형제 요나단을 살해한 트리폰을 배제하고 트리폰의 정적 데케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를 돕겠다고 나서 일방적으로 시리아의 합법적 왕으로 선언해버린다. 그에 대한 감사의 화답으로 유대는 완전 면세의 특혜를 받아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들이 비로소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했다는 사실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이제 이방인의 모든 굴레를 벗어버렸음을 의미했다. 유대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자주 독립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하스모니아 왕조의 출발이다. 하스모니아라는 이름은 이 형제들의 아버지인 맛다디아의 증조부 이름이었던 것이다.
(3) 2단계 헬라화
위와 같이 1단계 헬라화가 마치고 2단계 헬라화가 시작되는 것은 카르타고에서 승리하여 패권을 거머쥔 로마의 통치가 시작되면서다. 이 과정에서 하스모니아 왕조는 안티고누스를 마지막으로 헤롯이라는 인물에게 넘어간다. 당시 로마통이었던 헤롯은 로마 사람들의 지지 속에 로마 군대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마지막 왕 안티고누스를 처형하는 한편, 왕족의 정통성을 입기 위하여 공주 마리암네와 혼인을 하는 이중성을 구사했다.
성경을 처음 접하는 초신자들은 신약성서를 읽을 때 왕 같기도 하고 영주 같기도 한 인물들이 여기 저기 소개되어 헷갈리기 십상인데,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분봉왕'이라는 제도의 유래이다. 헤롯은 그 지위를 차지하고 나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실적을 내려고 열을 올렸는데, 대형 건축 사업이 대표적인 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큰 성전을 유대인에게 선사했는데, 솔로몬이나 스룹바벨이 지은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이 성전의 부속 건물에는 제국의 군주의 이름을 붙여 영광을 돌렸으며, 특히 헬라의 양식을 선호했다. 사람의 이름도 외국식 이름을 선호했다. 이전 성전들이 오로지 제사를 목적으로 설계되었다면, 헤롯이 건축한 성전은 일반인이 활용할 공간을 설계에 넣어 담론과 교육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물론 이것은 제국의 비용이나 헤롯의 사재가 아닌 유대인의 세금으로 돌려졌다. 이것이 2단계 헬라화의 주된 흐름이다.
이 글에서는 제1단계 헬라화 과정에 더 큰 비중을 두고 2단계 헬라화는 약술에 그치고 있지만, 이 두 번째 단계 헬라화가 이전 단계보다 얼마나 더 혹독하고 참혹한 것이었는지는 헤롯이라는 인물의 포악함과 잔인함이 대변하고 있다.
헤롯은 첫 부인 도리스에게서 난 안티파테르, 마리암네 1세에게서 난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불로스 등 자식들을 모두 모반 혐의로 처형할 정도였는데, 성경에서는 2살 이하 아기를 모두 죽였다던 그의 영아 살해 이야기로 그 잔인성을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메시야 탄생 담론이 아니라 당시 헬라화 과정이 얼마나 혹독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인데, 그래서인지 이 2단계 헬라화 과정에 가장 많은 메시야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대열의 하나로 끼어 우리 곁에 오셨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젤롯(열심당), 시카리(자객)와 같은 정파도 양생된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왕자'로 불린 이 영화의 주인공 '유다 벤허'는 어떤 로열 패밀리였을까?
(4) 두 종류의 왕자들
한낱 유대인이 '왕자'라고 불리게 될만한 경로와 배경이라고 할 것 같으면 위와 같은 과정 가운데 하나가 전부일텐데, 과연 유다 벤허는 어느 줄기의 왕자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동시대에 두 종류의 왕자를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맛다디아의 아들들과 같은 왕자다. 다른 하나는 헤롯 또는 헤롯의 아들들과 같은 왕자다.
먼저 후자에 대해서는 비록 압제자였지만 로마의 위대한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빌리면 더할 나위 없는 설명이 될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스라엘 사람이 돼지고기를 못 먹는 데 빗댄 말일 것이다. 이와 같은 헤롯 가문에 비하면 전자인 맛다디아 가문은 그 모든 아들이 민족을 위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은혜를 입힌 가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맛다디아 가문은 헤롯 가문과 마찬가지로 '왕'이 되기에는 큰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격 사유는 바로 '예언 속의 왕가(the Royal Family of Prophecy)'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맛다디아 가문의 경우 당대 정치·종교 지도자를 막론하고 유대인 누구도 다음 말에 이의 없이 동의를 했다고 한다.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대까지 우리는 시몬을 영구적인 영도자, 대사제로 삼는다. 시몬은 유다 국민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어 성전을 관리하고 온 국민의 활동을 감독하며 나라와 무기와 요새를 장악할 것이다. 온 국민은 시몬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나라의 모든 문서는 시몬의 이름으로 처결되어야 한다. 시몬은 자색 왕복을 입고 황금 장식물로 단장할 권한이 있다. 국민이나 사제 중 어느 누구도 이 결정의 어느 하나 무효로 만들 수 없으며 시몬의 동의 없이 나라에서 어떠한 회의도 소집할 수 없고 자색왕복을 입을 수도 없다(마카베오상 14:41-43)."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맛다디아 가문의 왕자들은 성경에 단 한 줄도 등장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책임을 다하였고, 헤롯과 헤롯의 아들들은 명실상부 성경에 기록된 가문이었지만, 아니 기록된 만도 못한 가문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
1960년대 <벤허>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다. 거의 벤허의 사적 복수 이야기로 기억된다. 반면 2016년 <벤허>에는 예수님의 얼굴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당량의 플롯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이나 가르침이 직접 기록으로 나타난다 해서 구속사가 더 잘 묘사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번 리메이크 작품에서 입증됐다. 그것은 마치 맛다디아 가문의 왕자들이 성경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서 그들의 얼굴들이 사라진 것은 아닌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삶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속사는 각각 얼굴을 가려 가면서 지금도 전개되어 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별점(5개 만점): ★★★☆☆
한 줄 평: "원저자(Lew Wallace) 가라사대, 예수님의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하라"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필자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하여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는 신학자다. 최근 저서로는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