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리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마 6:19-20)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경제문제는 우리들의 일상적 삶과 떼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돈을 벌어야 가족을 부양하며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것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앞세워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여 주신다.
오늘의 본문 속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놓지 말고 하늘에 쌓아놓으라고 하셨다. 보물을 땅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중심적인 소비를 의미한다. 땅에 쌓아놓은 보물은 두 가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나는 좀과 동록으로 인한 내적 부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도둑이다.
그런 모습은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과 흡사하다.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이들 도시들은 풍요로운 삶 때문에 유황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 소돔과 고모라가 겪었던 어려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돌라오멜이 주축이 된 강력한 연합군의 침공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소돔은 모든 재물과 양식이 약탈되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비롯한 주민들도 모두 포로로 끌려갔다. 아브라함이 사병을 동원하여 빼앗겼던 재물과 주민들을 구출해 주기도 하였다. 왜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는 침공하였지만,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던 헤브론 지역은 비껴간 것일까? 그것은 이들 두 도시가 당시 크게 번성하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부요함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초래한 것이다. 그에 비하여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지역은 돌이 많은 산간지역으로 외형적으로는 비약한 곳이었다. 자연히 그돌라오멜의 군대가 그런 지역에 관심을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또 다른 문제는 내적 부패였다. 물질적 풍요로 편안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그들은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게 되면서 성적 타락에 빠져들었다. 소돔이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하였는가는 그 도시를 방문한 천사들을 자신들의 동성애자로 삼으려는 했던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롯의 제지를 받게 되자 그들은 롯을 밀치고 그가 사는 집의 문을 부수고 침입하려 했다. 천사들의 강력한 개입으로 위기가 모면되긴 했지만, 소돔사람들의 성적 타락은 그만큼 심각했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놓으라고 명령하셨다. 과연 무엇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놓고 사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건전한 소비생활을 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재물을 수단으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하늘에 보물을 쌓은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잠언의 말씀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놓는 너무도 명백한 방법이다. 그것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여유 돈이 있으면, 그것을 은행에 예치해 둔다. 우리의 돈을 예치 받은 은행은 맡긴 액수만큼 우리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도움을 베푸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빚을 지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남을 불쌍히 여기며 돕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이웃을 향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열려 있느냐가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두 넵돈을 연보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를 크게 칭찬하셨다. 렙돈은 당시에 통용되던 동전 화폐 중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돈이었다.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크게 칭찬하신 것은 그것은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 과부가 넣은 연보함은 불쌍한 이웃을 위한 구제 헌금함이라는 점이다. 당시의 제도에 의하면, 이 과부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 할 불쌍한 이웃 당사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구제 헌금을 한 것이다. 그가 그런 구제헌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보다 더 못한 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이 남을 위하여 구제하는 여유 있는 마음 자세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