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글날 570돌과 ‘한글 민족’
얼마 전 '사민필지'를 접하게 되어 130여년 전의 감동을 다시 느끼면서 읽게 되었다. '사민필지'는 고종 황제가 1884년 육영공원을 세우고 미국 정부에 교사를 초청해 헐버트 선교사가 조선에 온 지 3년 만인 1890년 출간된, 한글전용 교과서이다.
헐버트 선교사는 한글의 과학적 구조와 편리함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고, 이렇게 뛰어난 한글이 '언문'이라는 이름으로 홀대받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세계의 지리지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이자 지리총서로 세계를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세계를 알리고, 한국을 모르는 세계인들에게 책으로 한국과 한글을 알린 것이다.
한글로 편찬하여 배포한 결과 한글보급은 물론 육영공원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순 한글로 기록했다는 이유로 다시 순 한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역사상 최초의 '한불자전'과 '한영자전' 등을 만든 것도 선교사들의 역할이었다. 특히 1884년부터 펴낸 쪽복음과 '예수성교전서'를 번역한 존 로스를 비롯하여, 선교사 중에는 언더우드와 게일의 역할이 컸다. 그들의 한글사용이 오늘날 한글 민족과 문맹 '제로(0)'의 국가를 만드는 데 기초가 되었다.
1894년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박사도 순 한글로 신문을 제작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적인 날이 찾아왔다. 우리는 이를 '경술국치'라고 부른다. 이런 시대 상황 가운데서도, '한글'이라는 이름을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이 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당시 주시경 선생의 '국어문법'과 '말의 소리'는 우리말의 체계를 정립한 최고의 서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문화정치를 시도했고, 이때 우리말을 연구하는 내국인 학자들이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말 사정, 외래어 표기법 등을 제정했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 선생 등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전에 창립되어 식민지 기간을 거쳐 오면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큰일을 감당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우리말 연구 기관일 뿐 아니라, 우리 말과 우리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였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나아가 우리의 말과 글을 우리 민족 모두에게 알린 실천 기관이자 민족 기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란 기구를 만들어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36년 간 일제 치하에서 가장 어려운 고통은 정신문화를 말살하고자 한 창씨개명과 더불어,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과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신사참배였다. 이는 곧 '교회에 대한 핍박'이었다.
그들은 한글 사용을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쳤다. 교과 과정에서 한글 교육은 사라졌다. 특히 찬송가와 예배 순서에서도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기미가요를 부르게 했으며, 일왕이 있는 곳을 향해 절하도록 했다. 전국의 학교와 면 소재지에 신사를 세워놓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세계 문자 가운데 한글, 특히 훈민정음은 흔히들 신비로운 문자라 부르곤 한다. 세계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고,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이런 문자는 없다.
그래서 한글, 정확히 말해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사실 한글은 우리 민족이 창조해 낸 위대한 문자이며, 디지털 강국 대한민국의 미래이다.
한글은 표음문자(사람의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문자)로서, 음절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쓰이게 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음절 구성의 원리도 간단해, 배우기가 쉬운 문자로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금년은 570돌을 맞는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이자, 오늘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1443(세종 25)년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음 17자와 모음 11자로 만들어 모두 28자이다.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 이를 반포했는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9일이 된다고 한다.
이때 <훈민정음 해례본>은 조선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반포할 때 찍어낸 판각 원본으로, 전권 33장 1책으로 돼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서문인 예의(例義), 정인지 등이 지은 해례와 정인지 서(序)로 돼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자 현재 국보 제70호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지금 국보 제1호는 남대문이다. 남대문은 1933년 조선총독부가 국보(당시 명칭 보물)를 지정하면서 그 첫 번째 목록에 올렸다. 숭례문은 광복 7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국보 1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화재와 부실시공 논란에 휩싸이면서 국보 1호로서의 품격에 큰 손상을 입었다.
더 이상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숭례문은 대한민국 국보 1호로서의 자격이 없어 보인다. 이제는 건축물에서 정신문화의 상징인 훈민정음으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한글의 투쟁> 서문에서 최현배 선생은 쓴 글이 기억난다. "한글은 우리 겨레 정신문화의 최대 선물이며, 세계 온 인류의 글자문화에 있어 최상의 공탑이다. 이는 우리의 자랑인 동시에 또 우리의 무기이다. 이를 사랑하며 이를 기르고, 이를 갈아 이를 부리는 데에만 우리의 생명이 뛰놀며, 우리의 희망이 솟아나며, 우리의 행복이 약속된다."
/이효상 사무총장(미래목회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