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역사
1) 교회설립과 발전 과정
후스의 교회개혁정신은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를 통해서 이어지게 되었는데, '형제연합교회'란 이름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형제자매요, 또한 연합된 하나의 교회로 이해하였고, '형제연합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로서 지교회의 의미를 전제하였다. 이러한 교회는 페트르 본 췔취츠키(P. von Chelcicky: 1380-1452)란 한 사람 평신도의 영향에 의하여 사람들이 모이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원래 '타보리텐파'에 속하여 있었으나, 그 그룹의 폭력불사론에 반대하여 교회개혁은 세상의 권력과 단절할 때 가능하다고 보고, 비폭력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던 인물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사랑하며 복음의 평화정신을 강조하는 그에게 감동된 사람들이 주위에로 모여왔던 것이다. 그러나 형제연합교회를 창설한 주인공은 역시 췔취츠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따랐던 그레고아 폰 프라그(Gegor von Prag:1474년 사망)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정신적지도자였던 췔취츠키의 신앙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특히 성경을 신앙생활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았고 특히 신약성경에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매우 중히 여겼다. 성만찬의 가르침에 있어서도, 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거절하고, 주님의 만찬에 함께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성경적 관점을 더 잘 이해하고 실천하였다. 이점은 루터의 공재설보다 칼빈의 성만찬이해에 일치하는 점으로 이해된다.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는 1464년에 독자적인 교회법을 마련하기 위하여 총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믿음에 의한 칭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 교회훈육 등을 교회의 신앙생활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이 교회가 믿는 칭의는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랑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믿음과 사랑에 근거한 칭의가 확실한 소망을 가져다주는 참 복임을 믿었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에 기초한 형제연합교회의 칭의론은 선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톨릭교회의 입장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형제연합교회는 사랑은 기독인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하는 성령의 열매로 인식되었으며,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한다는 증거로 이해하였다. 그 때문에 형제연합교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올바른 믿음(신앙)의 외적증거로 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행위가 없이 말로만 고백하는 신앙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였고, 또한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고자 하는 결단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형제연합교회의 훈육은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훈육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도록 돕는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훈육은 강요나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애정에 근거한 사랑의 훈육이었기 때문이었다.
1646년에 이르러 그레고어 폰 프라그는 총회를 열고, '형제연합교회'라는 이름을 교단명으로 채택하고, 조직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제비뽑는 방식으로 3명의 성직자를 선출하여, 이들을 장로(Senioren)로 불렀고, 그 중에 한 사람이 수석장로가 되어 형제연합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감독(Bishof)직에 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99년이래로 10명으로 구성된 협의회가 있었는데, 이들 위원들은 성직자들 가운데서 역시 제비뽑기로 선출하였고, 이미 기존 선출된 3명의 장로들과 함께 형제연합교회의 최고 심의 의결기관이 되게 하였다. 즉 소위 형제연합교회의 중앙지도부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의 총회는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로서, 즉 10인 장로들의 협의회와 목사들, 그리고 집사들로 구성하였다. 이와 같은 형태로 구성된 형제연합교회는 먼저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합당하게 여기지 않고, 모두 다시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러한 재 세례는 수년간 지속되어 독립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양 영성체파'가 중심이 되어 있는 보헤미아의 가톨릭교회는 계속적으로 형제연합교회를 박해하였고, 도리어 이들이 개종하여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도록 강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제연합교회는 그 어떤 협박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성경 위에 굳게 선, 교회를 견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형제연합교회는 1494-1528년 사이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가 정착되고, 안정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 집중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생각하면, 형제연합교회에는 수없는 가톨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한 순수한 사도적인 신앙을 견지하고, 그에 합당한 교회를 존속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루카스 폰 프라그(Lukas von Prag), 얀 아우구스타(Jan Augusta), 얀 불라흐스라브(Jan Blahslav)등이 형제연합교회를 이끌게 되며, 형제연합교회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먼저 루카스 본 프라그(1460-1528)는 형제연합교단의 중요한 신학자로서 행정조직능력이 뛰어난 자이기도 하였다. 1517년에 이르러 그는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형제연합교회가 지금까지 많은 박해로 인하여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세상적인 것들과는 단절하고, 폐쇄적이며,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루카스로인하여 새로운 개방성을 취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는 형제연합교회가 지금까지 소극적이며 폐쇄적인 분파주의에 머무르기보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기 위하여 더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기독인의 책임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본질적인 것과 필수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으로 구분하게 된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믿음, 소망, 사랑이 중심에 있었다. 형제연합교회는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잘 이해하였고, 이러한 믿음에는 인간의 그 어떤 개입이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다. 그리고 사랑 또한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해하였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믿음, 사랑 가운데 참된 소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소망은 기독인의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표를 밝혀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때문에 이러한 소망은 다가올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보았으며, 바로 이 3가지 믿음, 사랑, 소망을 하나님과 기독인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사역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필수적인 책임사역은 교회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와 성례의 집행이었다. 이러한 필수적인 사역의 목표는 역시 모든 사람들을 믿음, 소망, 사랑에로 인도하는 데 있었다. 루카스는 교회의 사역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것과 필수적인 것을 구분하여 줌으로써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을 특징짓는 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루카스의 관점은 형제연합교회에 성경과 교회를 이해하는 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성경 속에서 본질적인 것과 필수적인 것을 구분함으로 '정경 속의 정경'(Kanon im Kanon)인 '믿음, 소망, 사랑'의 복음의 본질적인 가치를 일깨울 뿐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상황에 처한다할지라도 이 본질적인 것에서 언제나 하나가 될 수 있는 연합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
*크리스천투데이는 본지 편집고문인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전 총신대 총장)의 논문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의 역사적 배경-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생애와 관련하여-'를 저자인 정 박사의 동의를 얻어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