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형제연합교회와 종교개혁자들과의 관계
1517년 루터는 독일의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었고, 1519년에 이르러 먼저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의 가르침을 복음적인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루터는 후스파 사람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으며, 또한 보헤미아지역에서 많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인 루카스가 루터의 종교개혁의 입장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과 함께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는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에 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루터와 루카스)은 서로 만나 신학적인 대화를 통하여 서로에게 조언하게 되었다. 루터는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가 취하였던 제 세례, 성직자의 독신생활,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일곱 가지 성례들을 따르고 있음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루터가 지적한 것들에 대하여 비판을 수용하고 폐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루터가 제시한 성만찬의 신학, 특히 육체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찬 시에 그 만찬에 함께 한다는 공재설에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제연합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하면서, 성찬에 함께 하시는 분은 영으로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성경적 관점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카스의 성찬이해는 이미 칼빈의 것과 일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성만찬론과 교회의 훈육과 교회규율의 강조 때문에 오히려 "칼빈 이전의 칼빈주의자"로까지 평가되기도 하였다.
형제연합교회의 지도자인 루카스가 죽은 후, 얀 아우구스타(J.Augusta:1572사망)가 장로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신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로 형제연합교회를 이끌었다. 1542년 그가 비텐베르그의 루터를 방문하였고, 역시 루터와도 깊이 교제하는 관계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타는 1532/33년에 형제연합교회의 신앙고백서를 만들 때, 루터가 만들었던 아욱스부르그 신조의 도움으로 유사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루터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고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인쇄하도록 도와주었고, 또한 서문에서 추천하는 글을 직접 써주기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형제연합교회의 루터와의 관계는 루터와 멜란히톤이 죽은 이후에 유감스럽게도 악화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강한 종파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루터파 추종자들과의 교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독일의 루터교회는 전체 유럽의 프로테스탄트가 연합하여 함께 발전하는 길을 모색하려는 공동관심사보다는 그들 자신의 교회안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특히 1555년에 체결된 아욱스부르그 평화화의가 문제였다. 그 이유는 이 조약에서 명시된 'Cuius regio, eius religio"란 문구 때문인데, 이 말은 '통치자의 영토에는 통치자의 종교가'란 말인데, 그 뜻은 영주와 고위 성직자들이 선택하는 자신의 종교에 따라 그의 영토 내에 있는 백성들은 그 종교를 따라야 하는 종교선택의 권한이 통치자에게 주어진 것을 뜻하였다. 즉 백성들은 그의 영주가 선택한 종교를 따라야 하는 의무를 규정해 준 것이다. 이러한 평화조약(화의)으로 결국 루터파가 로마가톨릭과 동등한 종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루터파교회만 평화와 안전을 가톨릭으로부터 보장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루터교회의 독자적인 행동에 실망한 형제연합교회는 오히려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연합을 강조하는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쳐(M.Bucer)와 제네바의 칼빈에게로 관심이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칼빈의 가르침이 형제연합교회가 가르쳐왔던 신앙교리와 신학적으로 여러 부분(교회훈육, 성만찬, 국가권력으로부터 교회의 자유, 그리스도 왕권의 삶의 영역에서의 주권 등)에서 일치하고 있는 점들을 확인하면서, 루터파와는 단절하고, 칼빈파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의 젊은 세대들은 비텐베르그가 아닌, 제네바, 하이델베르그, 바젤, 스트라스부르그, 심지어 헤센지역에 있는 헤어보른대학 등의 개혁교회가 세운 학교들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548년에 이르러 보헤미아의 왕 페르디난드 1세(Ferdinant I.)는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의 모든 설교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형제연합교회의 지도자 아우구스타는 그 당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16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극심한 박해를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557년에 이르러 얀 블라호스라브(Jan Blahoslv:1571년 사망)가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의 장로로 선출된다. 그리고 그는 형제연합교회의 후계자 양성을 위하여 교단 내에 인재를 발굴하여 외국에 유학하도록 개방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이전까지 형제연합교회는 목사양성을 특별한 학력을 요구하지 않았고, 훌륭한 목회자 밑에서 자체적으로 경건훈련을 받게 하고 소명과 사명을 가진 자를 목자로 세워 교회의 예배를 주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목사에게 특별히 급여가 따로 지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가난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으며, 목사들은 그들의 생계비를 자비량으로 해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목사는 외국대학에서 공부하며 고전어를 배워 성경원어에 충실한 설교자가 되도록 훈련받게 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체코어의 크랄리체 번역성경(1579- 1595)을 소유하게 되면서, 교회지도자들의 학문적인 신학수학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크리스천투데이는 본지 편집고문인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전 총신대 총장)의 논문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의 역사적 배경-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생애와 관련하여-'를 저자인 정 박사의 동의를 얻어 매주 금요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