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칼럼] 코메니우스의 사역과 활동(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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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박사

▲정일웅 박사

실로 코메니우스가 학교의 개혁에 관한 개별적인 관심과 그의 범지혜의 사상을 표현하였던 그의 '범지학의 서설"(Prodromus Pansophiae)이란 책이 영국에서 출판되면서 유럽전역에서 그는 교육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폴란드나, 헝가리에서만이 아니라, 영국과 스웨덴, 불란서 파리 등, 여러 나라에서 초청을 받게 되는데, 대부분 코메니우스를 통하여 학교를 개혁하고, 수업교재를 집필하게 하며, 아이들을 교육하는 계획들을 그에게 맡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고향(보헤미아-모라비아)만은 그에게 문이 닫혀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 보헤미아-모라비아에 있는 백성들은 종교박해로 인하여 깊은 어두움과 자유 없는 가운데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땅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는 금지되었고, 옛날의 책들은 모두 불태워졌으며, 학교들은 폐쇄되었고, 모든 자유는 피 흘리는 핍박가운데 처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잠시 코메니우스를 비롯하여 추방된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보였던 일은 작센지역의 영주가 1631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프라하까지 침공해왔을 때였다. 코메니우스는 해방된 고국에서 공적인 일들을 새롭게 추진하려는 준비를 열심히 하였다.

이 기간에 몇 가지 글들이 작성되었는데, 특히 그의 '다시 일어선 학개 선지자'(Haggaeus redivivus)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 안에서 코메니우스는 종교개혁의 끝냄과 프로테스탄트 내면에 현존하는 불화를 극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인간적인 억지주장은 사랑이 충만한 조화성으로 약화시켜야 하고, 억지주장과 적대감은 중단되어야 하며, 실제적인 경건과 사랑을 통하여, 정부당국과의 관계뿐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도 삶의 전체가 변화되도록 힘써야만 하는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1648년 스웨덴의 군대는 프라하 주변에서 가톨릭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다. 더욱이 프라하 몰다강의 왼편 강가를 점령하였다. 많은 망명자들이 그들 군대무리의 전투반열에 참여하여 피를 흘렸다. 수없는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를 위하여 전쟁을 이끌었던 스웨덴군대의 승리를 희망하였다. 그 기회에 코메니우스는 추방된 보헤미아의 사람들과 그 조국의 해방을 위한 도움을 얻으려고 스웨덴 수상 옥센스티에르나(Oxenstierna)와 담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일과 인간적인 호의는 서로 결부될 수 없다는 것과 인간적인 도움에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육을 경험해야만 했다. 코메니우스가 수년 동안 스웨덴의 학교교육개선을 위하여 수고했던 일이 허사가 되었다. 수많은 망명자들의 그들의 생명을 스웨덴과의 동맹관계로서 참여한 전쟁터에서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침내 1648년 치쳐있던 양편의 군대들이 오스나브릭과 뮌스터(Osnabreuck- Muenster)에서 소위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Friede von Westfalia)을 체결함으로서 전쟁은 끝났으나, 그 어느 편도 체코(보헤미아-모라비아)의 백성을 책임져주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모든 이전의 약속되었던 말들에 대하여 그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은 1555년 아욱스부르그에서 합의했던 '통치자의 영역에는 통치자가 선택한 종교이어야 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체코(보헤메아와 모라비아)의 프로테스탄트는 이러한 원칙의 적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체코의 백성들은 다시 가톨릭의 합스부르그에 속한 자들의 통치 속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는 침묵하면서, 그의 통치 권리에 따라 종교결정권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1648년 10월 11일에 스웨덴 수상에게 잘못된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체결에 대한 실망감을 편지로 써 보냈다.

코메니우스는 그 당시 형제연합교회의 3번째 감독직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제연합교회형제들은 종교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게 되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이미 유럽 여러 나라로 흩어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코메니우스 역시 이전의 망명지였던 폴란드 리사(Lissa)에서 거주하고 있던 때였다. 그에게는 또다시 어려운 시련의 시간이 닥쳐왔고, 개인적으로 코메니우스는 병약해진 그의 아내를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남겨진 3딸과 아직 어린 아들의 아버지로서 코메니우스는 3번째 결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 형제연합교회를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워진 것을 느끼고, 코메니우스는 마지막 감독으로서 1650년 그의 유명한 '죽어가는 어머니인 형제연합교회의 유언'(Vermaechtnis der sterebenden Mutter der Bruederunitaet)이란 글을 쓰게 된다.

이 글의 내용에는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의 특징, 코메니우스의 신학적인 견해와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 칼빈의 개혁교회에 대한 그의 신학적인 관점들이 담겨 있다. 코메니우스가 이글을 쓰게 된 이유는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곧 해체 위기에 직면한 형제연합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들의 신앙적인 유산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을 확고히 붙들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또한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신앙의 보화를 자신이 속한 교회형제들뿐 아니라, 다른 교회의 형제들, 즉 루터파교회와 칼빈파교회의 형제들, 심지어 로마가톨릭교회 형제들에게까지도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코메니우스가 생각했던 하나님이 맡기신 신앙의 보화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교회의 훈육', 그리고 '교회연합의 정신' 등이었다. 다시 설명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사랑은 이미 15세기 초엽에 진리의 순교자 요한 후스가 심어준 복음의 정신이었다. 코메니우스는 후스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친구로 불렀다. 이것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의 본질이 얼마나 후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역시 로마가톨릭교회를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어머니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자기 자녀의 피를 빨아먹는 호랑이이자, 변모한 계모에다 비유하여 언급하였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우상을 쫒았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그들 세력과 투쟁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해명하였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정절을 버린 신실하지 않는 어머니, 부정한 아내로 언급하였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것을 특히 계시록 17:16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경고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 형제연합교회의 귀중한 신앙의 보화는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하도록 해 주는 교회의 훈육을 들었다. 신앙이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훈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일찍이 루터가 말한 칭의론의 남용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즉, 가톨릭교회의 행위구원에 대한 반대를 위하여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 얻음(칭의론)을 강조하였지만, 이웃을 향한 사랑의 계명이 삶에서 믿음의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음 것임을 또한 잘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가 줄기차게 실천해 왔던 '훈육의 가치를' 강조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교회의 훈육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형제단교회와 칼빈파교회는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또한 인정하였다. 그러나 칼빈주의 자들이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에 속한 것들을 너무 많이 추측하여 해석함으로써, 재세례파, 소니언파, 알미니안파 등, 그밖에 많은 해충들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칼빈파 교회는 단순하고, 덜 사변적이며, 하나님의 깊은 비밀한 경륜에 대하여는 더 겸손히 말해야 할 것을 충고하였다.

역시 세 번째 코메니우스가 언급한 형제연합교회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보화는 교회연합의 정신이었다. 라틴어로 '우니타스 프라트룸'(Unitas fratrum)은 '형제연합'이란 말로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의 연합을 전제한 지(支)교회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 나누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교회에 속한 지(支)교회들인 셈이다. 코메니우스는 바로 이러한 형제연합교회의 정신 아래서 자랐기 때문에 루터파교회와 칼빈파교회는 형제연합교회의 자매교회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지금 감독직을 내려놓고, 그의 형제연합교회를 해산하는 위기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어떤 절망이나, 체념에 빠져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는 계속해서 그가 구상하고 있던 탁월한 '범지혜적인 작업'(Opera Pansophiae)을 서두르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리고 그의 형제연합교회를 이끌 수 없었다면, 그는 이제 전 인류를 향하여 그들을 섬기기를 원하며, 더 좋은 미래를 준비하도록 돕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1656년 리사에 머물러 있는 동안 코메니우스는 다시금 일어난 전쟁으로 인하여 도시가 불타게 되고, 그의 집과 그의 도서실과 그가 수십 년 동안 수고하여 만들었던 많은 손으로 작성한 원고들이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그때에 그의 옛 화란의 후견자였던 더 기어(de Geer)의 아들인 '라우렌티우스'(Laurentius)가 노인인 된 코메니우스와 그의 가족을 화란으로 초청하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그가 암스테르담에 마련해 준  집에서 인생의 노년기를 보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그는 1657-1658년에 그의 기념비적 출판물인 '교수학대전집'(Opera didactica omnia)을 출판하게 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14년을 더 살다가 1670년 11월 15일 78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역시 암스데르담에 있는 나아르덴의 개혁교회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 글이 1667년에 출판한 '평화의 천사'(Angelus Pacis)와 1668년에 출판한 '꼭 필요한 한 가지'(Unum necessariun)라는 소책자이다. 전자는 화란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임박했을 때, 형제연합교회의 노 감독이 그들 양국의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 화해조정자로 추천되어 대표연설을 하였는데, 그 연설 중에 평화를 호소했던 원고내용이다. 즉 코메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양편을 향하여 전쟁대신 평화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논쟁의 원인은 무역해상로인 바다를 서로 차지하려는 주장 때문이었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연설에서 바다는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암시하였다(시95:5). 그리고 식민정책에 대한 질문을 거론하였다.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봉사해야 하며, 유럽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자신들의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파된 말씀을 지지하기 위하여 먼저 스스로 평화 가운데서 사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가 왕으로 경배되는 곳에서는 모든 불화와 논쟁이 제거되어야 하며, 특히 교회들 아래에서 더욱 그러해야하며, 그렇지 않을 떼, 그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불타는 진노를 초래하게 될 것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역시 그의 마지막 작품인 '꼭 필요한 한 가지'란 글에서도 비슷한 감독의 말이 나타난다. 즉 이 글은 팔츠의 겨울왕 프리드리히(Friedrich)의 아들 루프레히트(Ruprecht)에게 봉헌한 것이다. 인간은 그의 행운을 세상에서 헛되이 찾으려 하지만, 거기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을 찾는다면, 거기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성경 안에서 우리를 보존되게 해 주는 것처럼, 그의 살아 있는 말씀은 모든 인간적인 지혜보다 더하며, 역시 모든 신학보다 더하다고 하였다. 그의 계명은 모든 인간적인 법위에 높이 서 있는 은혜이다. 코메니우스는 그 책의 마지막에 "나의 전 삶은 순례자의 배회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나는 거주지를 항상 바꾸어야 했고, 나는 그 어디에서도 항상 고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나의 하늘의 고향을 바라본다."라고 써 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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