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칼럼] 아침에 보니 레아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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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야곱에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창세기 29:25)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하였던 야곱이었지만 주변 환경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변한 것은 야곱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내적 확신이 생기면서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러한 임마누엘의 신앙은 순간순간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감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축복의 핵심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란에 도착한 야곱은 양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우물가로 나왔던 외사촌 여동생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첫 눈에 반한 야곱의 첫 사랑이 되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온 나그네에게 우물은 지친 몸을 쉬고 마른 목을 축일 수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입니다. 그런 우물가에서 야곱의 젊은 마음을 잡은 첫 사랑의 여인을 만난 것입니다. 라헬과의 사랑 안에서 야곱은 이방생활의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이기도 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은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라반이 제시한 칠년간의 힘든 노동도 마치 며칠을 지낸 것처럼 쉽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랑은 큰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사랑'은 히브리어로 '아하바'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사랑이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 스톨게 등 여러 종류로 나누어지지만, 히브리어는 '아하바' 하나입니다. 헬라어는 분석적인 반면 히브리는 통합적이어서 오직 하나만의 사랑이 존재합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모두가 같은 성격의 사랑이고, 단지 그 범위가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절대 폐쇄성의 사랑인 반면에 친구나 이웃과의 사랑은 그 범위가 넓어져서 그 농도에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300년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아하바'를 모두 '아가페'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소위 '칠십인역'이라고 불리는 헬라어 구약성서 번역은 왜 사랑을 모두 '아가페'로 번역한 것일까요? 아마도 사랑은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강조했던 것이기도 합니다(요일 4:7).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은 본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식욕이 있어야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본능이 있어야 결혼이 가능하고 또한 자녀를 낳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런 본능에는 두 가지 공통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본능이 인간의 욕심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식욕은 비만과 같이 건강의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의 본능도 조절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정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본능의 두 번째 약점은 이기적이라는 점입니다. 본능은 자기 존재를 방어하는 일차적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능은 본질적 성격상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약점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을 이타적이 되도록 가꾸는 것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이라도 균형 있게 조절되고 절제되며 또한 이타적인 방향으로 다듬어진다면, 그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참된 사랑, 곧 아가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은 인물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형을 피하여 먼 길을 떠나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야곱이 이제는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회개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야곱에게 지난 잘못에 대한 회개의 열매는 자기가 속인 것처럼 속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속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가장 큰 은혜는 십자가의 은혜인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 속에는 자신의 외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담겨 있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라헬과의 결혼은 약속하면서 7년간의 노동을 요구하였습니다. 지금도 아랍 베드윈족들에게는 결혼의 대가로 장인 될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모하르'라고 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7년이라는 긴 기간도 마치 며칠인 것처럼 보냈습니다. 드디어 7년을 다 채우고 이제는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날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던 야곱을 위하여 거대한 잔치가 벌어졌고, 황홀한 신방이 마련되었습니다. 달콤한 첫날밤을 보내고 나서 아침에 깨어보니 밤새도록 신혼 첫날밤을 보낸 여자가 야곱의 첫 사랑 라헬이 아니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레아였습니다. 성경은 레아의 안력이 약하다고 하였습니다(창 29:17). 여자의 매력 포인트가 눈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레아는 그렇게 매력이 넘치는 여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레아와 야곱이 첫날밤을 보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라반의 치밀한 사전 각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너무 들뜬 야곱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무엇엔가 홀린 채로 그날 밤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속임수에 능한 야곱이 라반에게 보기좋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형을 시집보내지 않고는 동생을 먼저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 라반이 내세우는 이유었지만, 실제로는 안력이 약한 레아를 속임으로 결혼시켜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끌어안고 있는 것이 참이요 진리인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헛된 것임을 깨닫는 비참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거짓이 없는 믿음'의 소유를 칭찬하였는데(딤후 1:5), 믿음에도 거짓이 있을 수 있다는 반증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올바른 것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자신들이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계 3:17).

라반의 속임수에 빠져 라헬 대신에 레아와 결혼하게 된 야곱은 또 다시 라헬을 위하여 7년간 아무런 임금도 받지 않고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무참하게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신의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시게 하시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그것은 당사자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소개된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 여자는 30여 년 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몇 차례의 기차 무임승차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동안 마음에 걸렸었는데, 30년이 지난 후 그것을 갚겠다고 서울역 직원에게 30만원이 들어 있는 봉투를 두고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만 자신도 그것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비록 고통스럽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런 속에서 보이지 않는 내적 치료를 받은 셈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런 고난의 보상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과 함께 시녀 두 명 곧 레아의 시녀였던 실바와 라헬의 시녀였던 빌하를 첩으로 맞이했습니다. 결국 야곱은 네 명의 부인을 얻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이들 네 명에게서 12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기도 한 자손 번성의 축복 곧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라"(창 28:14)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값을 지불하였고, 하나님은 그런 대가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시키셨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더욱 성숙하며 하나님의 인물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결국 대가 지불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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