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설교는 삶의 도전과 변화, 세상의 소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도구요 매개체이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이라고 본다. 그래서 설교의 현장을 주의깊게 살피게 되는데, 필자는 설교학을 논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입장에서 대변자로 말하고 싶고, 설교자의 책임을 공고하게 하고 싶을 뿐이다.
오늘의 설교 현장을 일반적으로 분석해 보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즉, 누구나 자신에 맞게 이해하고 참고하여 타산지석이 되고 함께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일 뿐임을 고한다.
어떤 설교자는 본문을 읽어놓고 다른 동리에 가서 놀다가 오는 경우가 있고, 또는 내용이 명확하게 않아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는 경우,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경우,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 혹은 자기 자랑, 자식자랑, 부인 자랑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무엇을 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을 지루하게 늘어놓는 일도 많다. 설교자는 열심히 외치는데 듣는 이들은 핵심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대부분 성도들은 일주일에 한 번, 주일에 와서 말씀을 듣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혼돈한 세상에 찌들리고, 억눌리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절망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기 위해 교회로 오는데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주절거리는 것, 중언부언 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젊은이들에게는 평생을 살아가는 신앙의 기초를 닦는 시간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갈등과 고민의 연속이다. 가정의 문제 속에서 자식 걱정, 막막한 미래, 오늘의 기가 막힌 정치적인 현실 앞에서 각양각색의 인생의 고민을 가지고 오는 이들에게 설교자의 책임이란 매우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다양한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민도 없이 함부로 강단에 설 경우, 그들의 말씀의 내용을 보면 즉시 알게 된다. 누구나 한 두번 설교를 들어보면 준비가 된 것인지 아닌지 즉시 알게 된다. 다들 침묵하고 기도만 하고, 인내하고 있을 뿐임을 설교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인 필자도 늘 경각심을 가지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오늘의 삶의 정황에 비추어 말씀의 핵심을 바로 가르치고 혹은 전달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면서, 동시에 함께 설교자의 길을 가는 동역자들에게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첫째, 설교의 공공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설교를 사유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개인의 이야기나 간증 같은 것은 매우 조심하여야 한다. 당신은 매우 은혜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듣는 이들 모두에게 공감이 가고 은혜가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말라.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얇은 지식을 마구 늘어놓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설교의 공공성을 부정하고 사유화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경우라고 본다.
매주일 선포되는 메시지가 공공성을 확립할 수만 있다면 사회는 매우 밝아지는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날 이처럼 한국 사회가 이기적이고 극단적 맘모니즘에 빠진 것은 한국 교회의 설교가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책임은 목회자, 목사들에게 있는 것이다.
설교는 최고의 대언행위이다. 자기 이야기를 말하지 말라. 즉 설교의 공공성을 사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말라. 강단에서 서는 한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데 왜, 성도들이 당신의 잡다한 주변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가? 왜 당신의 개인의 사생활을 듣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오늘의 본문 메시지와 정말 깊은 연관이 있는 이야기인가? 메시지의 보조수단이 되는가?
러시아 현지 목회자들의 설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개인의 이야기나 간증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일들이 매우 일상화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말씀에 대한 인식에서 무엇인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로 하여금, 젊은 이들을 혼란으로 빠뜨리지 말라. 많은 경우 설교자들은 좋은 말,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한다. 그런데 듣고 있노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핵심이 없어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성도들은 일반 상식이나 잡동사니 지식을 듣기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는 더욱 더 어렵다. 정말 많은 고민과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설교자들은 익히 알 것이다. 나이 먹은 자들이 19세기 사고방식으로 21세기를 사는 세대의 상황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복음을 제시하고 말씀을 풀어내는 일에는 수 십배의 노력과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왜, 아이들은 설교시간에 스마트 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게임을 하고 있을까? 몸은 예배의 현장에 있지만 마음은 속히 끝나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자신들의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일까? 서로 서로 딴짓을 하고 있는 현실인 것을 설교자들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셋째, 한편의 말씀, 설교가 인생을 바꾼 실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설교에 최선을 다하고 말씀의 본 의도를 파악하여 오늘의 삶까지 연결시켜야 하는 작업은 매우 심오한 작업이고 종합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하여 사명을 부여하고, 설교자로 세우고 교회가 사례를 한다면 더욱 더 책임을 가지고 행해야 할 것이다.
준비없는 설교는 감히 범죄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잘못 증거하는 설교는 성도를 구덩이로 몰아넣는 죄가 아닌가? 생명을 죽이고 시간을 빼앗고 의식을 파괴하는 설교는 죄악이다. 많은 사람들의 비전을 상실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며, 예배를 예배답지 못하게 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종교행위에 있어서 범법행위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따로 있겠지만 역시 이러한 설교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상의 편협함으로 인해 자기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설교하지는 않는가? 권력으로 범죄한 자들을 축복하고 아부하는 설교자들, 보수는 수구가 되어 설교하고, 진보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가? 자기가 보고 듣고 아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는 않는가? 목사라는 아집과 이기심으로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위기상황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닌가 되짚어보고 성찰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은 설교를 들으면서 무조건 아멘으로 화답하지 말라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태도처럼 그 말씀이 정말 인지를 살피는 태도가 필요하다.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기도와 묵상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목사의 말이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무식한 생각을 버리기 바란다. 목사가 교주가 되는 것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성도들이 있기 때문임을 알라.
한국교회 목사들은 성도들을 무조건 순종하고 헌신하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미성숙한 성도로 교육해왔다. 성숙하여 혹시 트집을 잡을까 겁내고, 따지고 시비를 걸까 두려워하면서 강단에서 저주를 퍼붓고, 무조건 순종하는 성도로 강요해 왔던 것이다.
역시 공적인 일을 사유화하는 실수를 저지르고도 인식하지 못하는 범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하고 시비를 걸라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분노와 질서와 합리성,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선한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시세를 판단하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말씀을 공부하고 성도의 삶의 훈련이 필요하고, 기도하여야 한다. 신앙도서를 비롯하여 신학적인 상식을 넓혀가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또 설교는 목사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제안을 할 수 없으니 설교를 통한 범죄행위가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것임을 인식하고, 성도들이 깨어나야 목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사명에 책임을 가지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함께 살아나야 한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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