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을 보면 인생이 참 끈질기고 모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인생이 부질없고 허무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인생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 피조물 중 으뜸이다. 그러나 인생은 이슬과 그림자, 안개와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서 한 순간 여지없이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한 평가를 하기는 쉽지 않다.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다양하다. 흔히 경험하는 게 있다. 출세와 성공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오르고 또 오른다. 땅에 재물을 쌓기 위해 스스로 누릴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도 모르면서 부지런하게 악착같이 모으고 또 모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를 보면서 '어리석은 자'라고 낙인찍으신다. 아니 그런 자들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그렇게 살다가 사람들에게 버림당하고, 엄청난 재앙으로 자폭하는 일들을 보기도 한다.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불의를 신랄하게 비난하다 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됐다. 그때 예수님은 갈릴리로 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당시 세례 요한은 대단한 인기를 몰고 있었다. 수많은 무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를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사실 세례 요한은 위대한 영웅적 존재이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다. 천국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희망은 세례 요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물러서고 예수님 중심으로 재배열해야 한다.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남으면 된다. 희망은 '어떤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내'가 주인공이 되려는 억지를 버려야 한다.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다스리고 돋보이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예수님만 높이고 앞세워야 한다.
예수님은 선포하신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왔다. 이 세상 주인 행세를 하던 사탄은 꺾였다. 더러운 귀신의 작용들이 끝장났다. 예수님의 손에, 예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천국이 이 땅에 현실로 임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의 나라가 이미 사람들 가운데 다가왔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지금 여기'서 왕의 통치 아래 살게 되었다. 천국을 지금 이 순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와 그가 이룰 완성 된 나라를 기다린다. 마라나타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자는 자신의 인생 프레임을 다시 짜야 한다.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음 중심으로! 내 삶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재조정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자는 천국 이야기를 인생의 주제로 삼고, 천국을 화제 거리로 삼는다. 천국이 그의 관심거리이다. 천국을 꿈꾸며 살기에 헛된 일에 분주하게 살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달라진 세상'에 있지 않다. '누가 대권을 잡느냐'도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대권을 잡으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이 땅에 대한 기대는 늘 불방으로 끝났다. 우리의 희망은 이 땅을 떠나 선물로 받을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있다. 아직까지 이 세상에 희망을 두고 있다면 빨리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엄청난 삶의 변화를 경험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당부한다.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땅의 것만 추구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고. 땅만 쳐다보며 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라고.
멧돼지는 자나 깨나 땅만 쳐다보며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 삶의 태도를 달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여 미친 것처럼 살아간다.
김동호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를 사는 방식>에서 '화장실에 쌓은 돈'이라는 글을 소개한다. 어느 신혼부부가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소위 말하는 달동네에 방을 얻어 살았다. 화장실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집이다. 그래도 만족했고 행복했다. 왜냐하면 '어디서' 사는 것보다 '누구와'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아파트를 사서 집들이를 한다고 했다. 자그마한 선물을 사서 친구의 집을 갔다. 친구의 집을 다녀온 후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고, 따뜻한 물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아파트가 너무 부러웠다. 그때부터 아파트 장만을 위한 돈 모으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드디어 힘들게 돈을 모아 아파트를 장만했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또 다시 초청이 왔다. 더 넒은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게다. 다시 친구가 산 아파트로 집들이를 갔다. 가 보니, 그 집은 화장실이 두 개가 있는 집이다. 순간 아침마다 화장실을 먼저 가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자기 집 광경이 떠올랐다. 괜스레 부러웠다. 자기 형편이 짜증스러웠다.
다시 화장실 둘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정말 악착같이 일했다. 드디어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을 장만했다. 하지만 그는 몇 년 못살고 죽게 되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산 사람인가? '화장실 바꾸다 죽은 사람'이다.
나는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는가? 내가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목표 설정이 잘못되면 평생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가 끝마친다. 뭔가 이루는 것 같지만 끝까지 기진맥진하고 지친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고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신다. 이 땅의 나라보다 하나님 나라가 훨씬 더 가치 있고 중요하기 때문에. 이 세상 이야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남아 있기에. 예수님은 그 나라를 전하는 일에 전심을 다했다.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직접 맛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나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제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할 증인이 필요하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으로 살다 목숨을 잃으면서도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했다. 예수님 이름을 부인하면 그 나라에서 주님이 우리를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하다가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를 인정하실 게다. 그게 예수님의 약속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꿈꾸는 자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기도하는 그들. 때로는 함께 울고, 때로는 함께 웃는 그들. 어려울 때나 힘들 때 곁에 있어서 든든한 그들.
그런데 그들과 더불어 갈등하고 얼굴 붉힐 때도 있으니, 가슴 아프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그들인데. 그들로 인해 속상하고 마음 아플 때마다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자. 그러면 왠만한 건 참을 수 있지 않을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건 하나님 나라이지, 내 감정이나 내 명예가 아니니까.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