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들이 외쳤듯이, 성도의 삶은 '오직 은혜'로 표현된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은혜 받았다. 은혜스럽다, 은혜로 넘어가자.' 그렇다면 은혜(카리스)가 무엇인가?
J. I. 패커 박사는 이렇게 정의한다. "은혜는 버림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무가치한 자에게 주시는 그의 공로 없는 사랑을 말한다." 어떤 방법으로도 받을 수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호의가 바로 은혜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영적 거장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다. 죄악이 팽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쓸어버림을 당했던 시대에 살았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창 6:8).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삶을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표현했다(왕상 3:6).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했다(행 6:8).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그렇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 여정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도,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최악의 탈선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삶이 최선이요, 가장 안전한 삶이다.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하고 붙잡으면 어떤 상황이나 현실 앞에서도 낙담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잘 되고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모든 게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덕분이었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가 있다. 첫째, '쓸모없는 나'를 보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과거를 회상시킨다(엡 2:1-3).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임을. 사탄의 통치권 아래 살았음을. 그리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음을.
지나온 과거를 생각하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이다. 감사할 것 밖에 없다. 나 같은 게 무엇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 너무 부족하고 연약한데, 목사로 불러주셔서 목양의 사역을 감당케 하셨는지? 형편없는 목사를 그래도 담임목사라고 사랑해 주고, 존중해 주는지.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전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는데, 하나님의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로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고 고백한다(딤전 1:13-14). 그런 자신을 보니 자연스레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고백밖에 할 말이 없다.
'죄인 됨과 부족함'을 인식하는 게 은혜의 길로 들어서는 출발점이다. 다섯 번의 결혼에 실패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불륜 관계를 맺다가 현장에서 발각되어 사람들에게 질질 끌려온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실 때, 그 여인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만나주시고 집으로 방문해 주실 때, 삭개오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만선의 축복을 허락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베드로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주님 앞에서 죄인이요, 실패자요,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들어서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서는 또 다른 통로가 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는 것이다(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다(4). 어느 정도의 큰 사랑인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일 정도의 사랑이다.
아들을 죽이시고,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5). 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다(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6b). 그래서 고백한다. "너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5b)." 이러한 은혜는 그저, 공짜로 주어진 게 아니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뱅이인 우리를 부요한 자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기 때문에 주어진 선물이다(고후 8:9).
은혜가 메말라갈 때, 부요하신 하나님의 사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 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불러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의 은총을 주시고 의롭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해 주시고,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주셨다. 무엇보다 날마다 우리를 주의 날개 아래 거하게 하시고, 품어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시켰던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대구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3층 사택에서 살았다. 어느 날 어린 막내딸이 창문에 올라가서 떨어지려고 하는데, 둘째인 형규가 동생을 붙들고 울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던 아내가 놀라서 들어와 보니 막내딸이 창문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 충현교회에서 섬길 때이다. 사택 앞에서 친구와 놀고 있던 형규가 달려오는 차에 부딪혀 저 멀리 떨어졌다. 그런데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잘 크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약속하신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뿐만 아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도록 책임져 주신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그러니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때로는 현실이 우리를 속일 때가 많다. 따라오지 않는 환경과 상황 속에서 답답하고 짜증스러워할 때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마 6:31-32). 환경과 현실이 무겁고 크게 느껴진다는 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그 동안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무거운 짐과 고통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중요한 건 우리의 조건과 환경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느냐, 은혜를 떠나느냐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구하기만 하면, 좋으신 하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환상과 계시'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고후 12:1-6). '육체의 가시'도 하나님의 은혜이다(고후 12:7-10). 그때서야 참 평안과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눈만 뜨면 반드시 인생이 달라진다.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