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는 어느 부부가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내가 남편과 어린 딸을 남겨두고 먼저 죽었다. 얼마 세월이 흘렀다. 안타까워하던 주변 사람들이 새롭게 시작하라고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거절했다. 아직 아내의 흔적을 지울 수가 없고, 어린 딸이 있으니까.
포기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끈덕진 권고에 결국 만남을 가졌다. 그러자 어린 딸이 아빠에게 간청했다. "아빠, 나하고 같이 살면 안돼?" 그러나 사실 자식을 믿을 수 있나? 지금은 아쉬우니까 그렇지만, 언제 '나 몰라'라 할지 누가 알 수 있나?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언약을 맺어주셨다. 살아가는 동안 좋은 '친구'가 되고, 멋진 '신랑'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신실하게 지키시고 보호해주신다. 죽음에 임하는 그날 '더 좋은 세계'로 인도해 주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직 예수'님으로 만족하며 살 수는 없을까?
괄목할 만한 선교의 열정을 가졌던 모라비안교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진젠도르프 백작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쳤던 헌신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가 평생토록 가졌던 한 구호가 있다. "나는 하나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로 살아가려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만한 가치가 확증돼야 전적으로 그분을 따를 수 있지 않은가?
그럼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내 인생을 다 걸어도 충분한 분이시다. 왜? 예수님은 나를 위해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포기하시고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친히 찾아오셨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셨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신다.
때가 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재림주로 오셔서 온 우주 만물을 심판하셔서,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 불의한 자들을 무저갱에 처넣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영원한 왕으로 영광스럽게 통치하실 것이다. 그 예수님이 지금 보혜사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신다.
바울은 당시 무역의 중심지인 골로새 지역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소개한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지 아는가? "in Christ"이다.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가? 우리는 사탄의 통치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로 옮겨졌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다(골 1:13-14).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찬양한다(엡 1: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엡 1:5). 그렇기에 "예수 밖"에 있는 것이 최악의 저주이다(엡 2:12).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한다. 첫째,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골 1:15). 둘째,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다(15-17). 셋째,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시다(18). 넷째,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필요충분조건'이다(19).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충만하다. 다섯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했다(20).
예수님은 모든 약속과 언약의 성취자이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한 말씀 안에 온 인류의 구속 경륜이 모두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세상의 하찮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만든 '하찮은 가짜 신들 앞'에 무릎을 꿇지 말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런 예수님을 만났던 자들은 하나 같이 변했다. 열등감 속에 살던 삭개오가 변했다. 갈릴리 어부로 살았을 베드로가 팔레스타인 땅을 뒤집어 놓는 복음의 증인으로 변했다.
똑똑하고 실력 있는 것을 자랑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던 바울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로마, 유럽 선교의 포문을 여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게 미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불려졌다.
이제 더 이상 주저할 게 없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왕좌에 예수님을 '실질적인' 주인과 왕으로 모셔야 한다(골 2:6). 그때 우리 안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은 지금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별 것 없는 분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무력화시키는 장본인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나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나의 삶을 안전하고 풍성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날마다 예수님을 친구로 여기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살아간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살아가니 외롭지 않다. 나 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해서 예수님의 자원과 능력을 빌어서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주셨다. 달려가야 할 삶의 목표와 비전을 주셨다. 삶의 원동력을 공급해 주셨다. 힘을 공급하시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주셨다. 삶의 에너지와 행복을 주셨다. 평안, 기쁨, 자유, 만족함이 예수님에게서 나왔다. 예수님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주셨다.
그래서 '온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예수님을 찾아왔다(눅 6:19). 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도 듣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고질적인 질병도 고치기 위해서이다(17). 예수님은 찾아오는 자들에게 언제나 은혜로우셨고, 희망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은 내가 지칠 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용기를 주셨다. 마음이 외롭고 아플 때, 친구가 되셔서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다. 희망이 사라져 갈 때, 소망을 불러일으켜 주셨다. 아프고 병든 몸을 고치시고 치유해 주셨다. 속상하고 억울할 때, 부단히 참게 하셨다. 내 인생에 예수님은 최고이고, 최상이다.
언젠가 예수님은 재림주로, 심판주로 이 땅에 오신다. 이제 나는 그 분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 나라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시기에 나는 대답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제 나는 결정했다. 오직 예수로 만족하겠다고.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겠노라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전적으로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겠노라고.
데이비드 플랫은 <래디컬>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날(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날)로부터 기독교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어떤 이들은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렸고, 더러는 불에 타 죽었다. 허다한 이들이 찬양을 부르며 숨져갔다.
산 채로 살가죽을 벗기는 형을 받았던 인도의 어느 그리스도인은 집행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낡고 오래된 옷을 벗겨 주시니 고맙습니다. 이제 곧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겠군요.'
크리스토퍼 러브는 처형대에 오를 준비를 하는 사이에 아내에게 간단한 글을 남겼다. '오늘 저들은 내 육신의 머리를 자르겠지만, 내 영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끊어내지는 못하지요.'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죽음을 맞는 남편을 지켜보며 그 아내는 갈채를 보냈다."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