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의 선물 (5)] 복 있으라, 시험을 참는 자들이여!
키에르케고어의 '선물' 개념을, 키에르케고어 전문가 이창우 목사님이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 사도의 목소리로 들려 드립니다. 이번 시간에는 '성령의 선물'에 대해 설명합니다. 키에르케고어가 우울, 불안, 절망 등의 실존 문제의 해답으로 성령님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은 기본 전제가 '시험당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이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편집자 주
지난 시간에 위로부터 오는 좋고 완선한 선물을 받기 위한 조건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의심하지 말라는 것,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람 편에서의 완전성이라는 것, 믿는 자에게는 단 한 가지의 의심만 허용된다는 것, 곧 자기 자신을 의심하라는 내용이었지요.
이번 시간에는 분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쉽게 분노하는 자는 위로부터 오는 완전한 선물을 받을 수 없으니까요. 일이 잘 풀려나갈 때 누가 분노하겠습니까?
그러나 제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숨어 살아야 했고, 가족과 헤어져야 했고, 굶주려야 했고, 심지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화를 내며 하나님을 저주하고 교회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약 1:12). 그러므로 하나님이 시험을 주신다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악에게 시험받는다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시험은 각자의 욕심에 끌려 미혹될 뿐입니다(약 1:13-14).
의심 많던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친형으로만 생각했던 제가, 결국 그분을 믿고 수많은 고난을 경험했던 제가,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께 감히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듣기를 속히 하고 말하기를 더디 하십시오. 성내기도 더디 하십시오. 사람이 성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약 1:19). 위로부터 오는 선물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듣기를 속히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웃집 아줌마들이 나누는 재미있는 이야기일까요? 사람들의 충고일까요? 사람들의 성공담일까요? 아니면,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구원의 목소리일까요?
아닙니다.
인생의 터널을 지나간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속히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빠른 사람을 보십시오. 점점 더 말이 없어지다가, 결국 침묵하게 됩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도 듣기를 속히 하지요. 비교하자면, 말씀을 듣는 사람보다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더 많은 말을 하지요. 그러나 분노는 더 많은 말을 낳을 뿐입니다. 곧, 분노는 수다쟁이입니다.
그러나 자, 보십시오. 말씀을 듣는 데 빠른 사람, 그는 점점 더 말이 없어집니다. 그러더니 말씀 앞에서 침묵하게 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아실 겁니다. 그녀를 공격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심지어 그들도 말씀 듣기를 속히 했을 때, 다 떠났고 침묵만이 남게 되었지요. 심지어 성난 군중들도 잠잠해져 떠났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기에 그녀 역시 말하기를 더디 했던 겁니다. 그때, 궁극적으로 말을 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을 겁니다. "주여 속히 말씀하소서(시 143:7). 제가 듣겠나이다."
결국, 분노는 정작 말씀 듣는 귀를 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청이 떨어지게 소리쳐도 듣지 못합니다. 화를 내는 것을 참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마음 속에 분노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화를 내는 것을 극복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롭지 않은 것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도움으로 우리가 죽어야만 하는 것을 생산합니다. 곧, 의심입니다. 마음 속에 분노를 숨긴 자가 혼잣말로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놈, 분명 나를 해칠 거야. 혹시 나의 재산을 탐내는 거 아니야? 나쁜 놈, 결국 나를 배신한 거야!" 자신의 내면에 분노가 있는 사람은 온 세상을 다 정복한다 해도, 자신을 상실한 것이고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힌 것이지요.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영혼을 잃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막 8:36)?
그러나 듣기를 속히 하고 말대답을 하지 않는 자는 성내기를 더디하게 됩니다. 그는 화를 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습니다(엡 4:26). 오히려 그는 햇빛을 가리는 일식처럼, 빛들의 아버지를 가리는 일식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불변하는 것을 변화시키는 분노의 그림자에 의해서 숨겨지기 때문이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 분노에 가려져 그림자가 되시다니(약 1:17)!
따라서 "온갖 좋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이 말씀, 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이것은 이미 마음에 심어진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말씀입니다(약 1:21). 부디 다시 말씀드립니다.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왜냐하면 듣기를 속히하고 말하기를 더디하는 자만이 천국을 빼앗기지 않으니까(마 11:12, 눅 16:16). 왜냐하면 온유함만이 숨겨진 것들을 발견하니까(집회서 4:18).
온유한 사람은 "영혼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받은 선하고 완전한 선물입니다.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마 7:11)?
여러분은 이 "좋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빵입니까, 생선입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믿고 여러분의 필요를 공급해달라고 기도했던 겁니까? 세상적인 성공을, 부자가 되기를, 병이 치유되기를, 시험에 합격하기를,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를 기도했던 겁니까?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 하나님 한 분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 편에서의 완전성은 아닌지요? 그렇기 때문에 비유로 시작했던 이 말씀에 대해 사도 누가가 명확히 말했던 겁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