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6-1] 영화 ‘미녀와 야수’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아직 어린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필자는 매번 대작 디즈니(Disney) 애니메이션이 개봉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번 개봉작은 우리 아이에게 보여줘도 될까?' 학부모로서 아이가 관람하는 문화 콘텐츠 전반에 대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디즈니 작품들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한층 더 강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금번 <미녀와 야수> 실사판 영화도 마찬가지다. 단지 논란이 된 동성애자 캐릭터의 등장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부차적인 문제다. 보다 근본적으로 염려되는 부분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적 배경이다.
많은 분들이 필자의 염려와 경계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실 것으로 예상된다. "왜 디즈니 작품을 경계해야 하는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문화 콘텐츠가 넘쳐나는 마당에, 디즈니 작품들만큼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작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디즈니 작품들이 선정적 춤사위와 가사로 점철된 아이돌 그룹 공연이나, 엽기적인 캐릭터들이 자주 등장하는 다수의 일본 애니메이션들보다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에 유리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디즈니 작품들 대부분은 미적 감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상을 선보인다. 풍성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뮤지컬 합창을 통해 청각적으로 조화의 미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플롯은 또 어떠한가? 선행과 우애, 용기, 가족애, 남녀 간의 성실한 배려와 사랑, 그리고 고난 뒤의 내면적 성장 등 다채로운 긍정적 교훈들을 담아 전달하고 있다. 이 정도면 자녀들을 위한 완벽한 작품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영화 칼럼니스트로서 염려부터 앞서는 건 왜일까?
미녀와 야수: "아득하게 오래된 이야기, 실제로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지요(Tale as old as time, true as it can be)"
핀란드 민속학자 안티 아르네(Antti Aarne)는 1910년 유럽 각지의 전통설화와 민담 800개를 수집∙정리한 뒤 이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18년 뒤인 1928년 미국 민속학자 스티스 톰프슨(Stith Thompson)은 아르네의 분류법을 보다 세분화하여 민담과 설화 분류의 표준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아르네-톰프슨 분류 체계(Aarne-Thompson type index)이다.
아르네-톰슨 분류법에 따르면 <미녀와 야수>는 '잃어버린 남편 찾기(la recherché de l'époux disparu)' 계열에 속하는 설화다. 이 계열에 속한 설화나 민담의 수는 총 179개에 달하며, 이 설화들은 전 세계 각 지역에 고루 분포돼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유럽 지역만 해도 수십 개의 유사 설화가 고루 흩어져 전래되어 왔다. 이는 <미녀와 야수> 이야기의 원저자가 누구인지, 또는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됐으며, 그 오랜 시간 동안 널리 지속적인 사랑을 받은 대중적 이야기라는 증거일 것이다.
<미녀와 야수>의 유사 설화들 중 오늘날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756년 보몽(Jeanne-Marie Leprince de Beaumont) 부인이 어린이용 전래동화로 각색하여 출판한 <미녀와 야수> 이야기이다. 1991년판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이번 실사 영화는 보몽 부인의 각색본을 원본으로 삼고 있다.
원작 동화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실사 영화의 설정 및 플롯 사이에는 여러 차이점이 확인되는데, 그 가운데 핵심적인 것들을 짚어보자.
첫째, 디즈니 영화에는 원본 동화에 등장하는 벨(Belle)의 질투심 많고 탐욕스런 두 언니들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원본에 없는 개스톤(Gaston)이라는 인물이 언니들 대신 악역으로 등장한다. 둘째, 원본 동화에서는 야수가 장미꽃을 꺾은 벨의 아버지를 붙잡아 아버지가 죽든지, 아니면 딸들 중 한 사람이 와서 대신 죽든지 결정하라고 협박한다. 이에 벨이 아버지 대신 죽기 위해 야수의 성으로 찾아간다. 반면 디즈니 영화에서는 야수가 성에 들어와 추위를 녹이던 아버지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벨이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대신해서 야수의 성에 갇히게 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에 드러난 이 두 가지 설정 및 플롯상 각색의 이면에는 어떤 의도가 감춰져 있을까? 일단 상편에서는 두 언니의 배역 삭제와 개스톤의 등장 이유를, 그리고 하편에서는 벨이 아버지 대신 죽으러 성에 들어갔다는 설정이 각색된 이유를 살펴보려 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 "당신에게 구해줘서 고맙다고 한 적이 없었네요(I never thanked you for saving my life)"
벨의 두 언니들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에서 사라진 이유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족의 부재를 통해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대화하는 디즈니 특유의 플롯 설정 때문이다.
뮬란(Mulan)이나 모아나(Moana)를 비롯한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디즈니의 유명 주인공 캐릭터들은 거의 대부분 편모 혹은 편부 자녀, 아니면 양친 모두를 일찍 여읜 고아들이다. 이는 디즈니 작품들이 유럽의 전통 설화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럽 전통설화와는 무관한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 2003)'의 주인공 니모(Nemo)도 어머니 코랄(Coral)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은연중에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캐릭터다.
'The Blackwell Guide to Theology and Popular Culture'의 저자인 콥(Kelton Cobb)은 디즈니의 대작 애니메이션들이 거의 모두 부모의 죽음 혹은 캐릭터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유래되는 불안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백설공주(Snow White), 밤비(Bambi), 신데렐라(Cinderella), 정글북(The Jungle Book)의 모글리(Mowgli), 앞서 언급했던 니모(Nemo)는 모두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이다.
여기에는 디즈니사 창업자 월트 디즈니(Walt Disney) 본인의 경험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디즈니가 한창 백설공주(Snow White)를 시작으로 전래동화 기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성공하기 시작하던 1938년 무렵, 그의 어머니 플로라 콜 디즈니(Flora Call Disney)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라이온 킹>의 심바(Simba), <겨울왕국(Frozen)>의 엘사(Elsa)와 안나(Anna)는 어린 시절 아버지, 혹은 부모의 죽음으로 후일 왕권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 피노키오(Pinocchio), 그리고 백설공주(Snow White)는 실제로 죽거나 죽음에 가까운 임사(臨死) 상태를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미녀와 야수>의 플롯에도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벨은 어머니가 없고, (원본에 등장하는) 언니들도 없고, 나이 들어 노쇠한 아버지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야수에게 갇혀 생이별할 위기에 처한다. 벨이 대신 성에 갇히지만, 장미를 잘못 건드리려다 성에서 쫓겨나고, 늑대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다. 위기 상황에서 야수가 도와주지만, 이번에는 야수 자신이 상처입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디즈니 작품 다수의 원작을 구성하고 있는 유럽의 전통설화들, 그 가운데서도 19세기경 그림 형제(Brüder Grimm)에 의해 수집∙정리(그림 형제는 원래 언어학자로 독일어 형성과 발달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설화와 민담을 수집했다)되거나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에 의해 창작된 동화들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기본 모티프로 삼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들의 작품에 특히 죽음이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칼 융(Carl Gustav Jung)의 심리학적 유산을 계승한 문학이론가 니콜라예바(Maria Nikolajeva)는 죽음에 대한 각인이 아동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아동에게든 성인에게든, 죽음의 자각은 삶의 충족성에 대한 통찰로 승화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죽음의 위협을 주제로 삼는 동화들은 어린이들에게 삶에 대한 적극적 수긍과 용기를 심어주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순기능은 동화의 독자가 주인공의 죽음에 감정이입을 할 때 실현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들 수 있다.
반면 디즈니 작품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는 모티프를 순기능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드물어 보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영화들에서는 결말에서 죽음에 머물러 있는 주인공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저명한 심리학자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은 어린이들이 동화를 통해 주인공의 주변인물이나 주인공을 적대시하는 악역들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접하는 경우, 타자의 죽음을 객관화하는 데 익숙해지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는 곧 자신과 무관하거나 자신을 적대시하는 자에 대한 공격성,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경시하는 잔인함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런 정서 속에 길들여진 어린이들은 향후 타자의 죽음에 무감각한 인성을 갖출 가능성이 높다. 디즈니 작품들은 월트 디즈니 본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이 역기능적 정서를 다채롭게 포장해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개스톤(Gaston): "짐승을 죽이자(I say we kill the Beast)!"
<미녀와 야수> 전체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캐릭터는 다름 아닌 개스톤(Gaston)이다. 마을의 전쟁영웅인 개스톤은 벨을 아내로 맞이하려 하지만, 야수에 의해 자신의 뜻이 방해를 받자 사람들을 선동해 야수를 죽이려 한다. 이 때 그가 외치는 대사가 인상깊다. "짐승을 죽이자(I say we kill the beast)!"
중세적 배경, 횃불을 들고 마을 광장에서 외치는 소리, 불타오르는 볏짚 등은 명백하게 중세 마녀사냥의 패러디다. '짐승(beast)'은 기독교의 사상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유럽 중세에서 흔히 '마귀(the devil)'와 동일시되던 용어였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짐승(계 13:1)'을 연상시키는 단어였던 것이다.
결국 개스톤은 야수도 죽이고, 그 자신도 죽는다. 야수는 벨의 사랑으로 부활할 뿐 아니라 사람의 형상도 회복하지만, 개스톤은 영영 죽음에 함몰된다. <미녀와 야수> 영화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명, 완벽하게 죽는 인물이 개스톤이다.
그래서일까. 개스톤 역을 맡은 배우가 루크 에반스(Luke Evans)라는 점에 주목하자. 1979년생인 영국 웨일스 출신의 이 배우를 널리 알린 작품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Hobbit: The Desolation of Smaug, 2013)>와 <호빗: 다섯 군대의 전투(Hobbit: The Battle of the Five Armies, 2014)>이다. <호빗> 시리즈에서 인간족 영웅인 바르드(Bard) 역을 맡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은 에반스는 그 여세를 몰아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Dracula Untold, 2014)>의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뒀고, 에반스의 경력을 한층 돋보이게 해준 작품이 되었다.
에반스를 널리 알린 이 작품들에서 그의 이미지는 한결같다.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맞아 가족과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아버지이자 군주이다. 죽을 위기에 처한 가족의 존재가, 선이 굵고 남성적인 인상을 가진 이 배우의 비장미를 더한다. 죽음과 남성성의 이미지에 특화된 이 배우를 디즈니사가 눈여겨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
할리우드는 잠정적으로 에반스를 휴 잭맨(Hugh Jackman)의 뒤를 잇는 고독하고 남성적인 영웅의 대표 페르소나로 낙점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휴 잭맨은 <엑스맨(X-men)> 시리즈의 주역 중 하나인 울버린(Wolverine) 역을 맡아 왔던 유명 배우이다. 뱀파이어 영화인 <반 헬싱(Van Helsing)>의 주연으로 인지도를 쌓은 뒤 <엑스맨>의 울버린으로 헐리우드 최고 배우의 반열에 들어선 휴 잭맨의 경력을 에반스가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이다.
<미녀와 야수>의 개스톤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그는 왜곡된 기독교가 마녀사냥의 과정에서 자행한 선동, 편협함, 전체주의,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를 덧입고 있다. 흥미롭게도 2014년부터 방영 중인 미국 드라마 <세일럼(Salem)>에는 개스톤과 비슷한 설정을 가진, 그리고 에반스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역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는 17세기 말 메사추세츠 식민지 세일럼에서 벌어진 기독교의 마녀사냥을 각색한 작품이다.
<세일럼>의 남자주인공은 존 알든(John Alden) 대위로, 미국의 배우 셰인 웨스트(Shane West)가 연기했다. 작중 알든 대위는 마녀사냥을 역이용해 마을을 장악하려 하는 마녀들에 외롭게 대항하는 전쟁 영웅으로 등장한다. 휴 잭맨의 반 헬싱부터 에반스의 바르드와 드라큘라, 그리고 셰인 웨스트의 알든 대위까지, 뱀파이어나 용, 짐승처럼 기독교적으로 적대시되는 존재들과 싸우는 이미지가 진하게 각인된 캐릭터들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에반스가 맡아 열연한 개스톤은 <미녀와 야수> 전체에 은연중에 반기독교적 정서를 심는 일을 맡고 있다. 우연찮게도 이 작품에서 선한 역들(벨과 그녀의 아버지, 야수와 그의 식솔들)은 모두 요정과 마법의 비호 아래 있다. 이로 인해 <미녀와 야수>의 전체에서는 왜곡된 기독교의 어리석고 혐오스런 모습에 대비된 오컬티즘(Occultism)의 신비로운 매력이 명료하게 부각되고 있다. 오컬티즘이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신비한 원리와 힘을 숭배하고 이용하려는 시도를 총칭하는 말로, 무속, 마법 등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동성애 코드: "마을에 개스톤의 절반만큼이라도 남자다운 사람은 아무도 없지(For there's no man in town half as manly)"
사실 <미녀와 야수> 실사 영화가 국내에 개봉한 지는 일주일도 안 되었지만, 이 작품에 포함되어 있는 동성애 코드에 대한 국내외의 논란은 이미 몇 주째 진행됐다. 논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작품에 동성애 캐릭터를 명시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특히 이 작품이 디즈니 작품이라는 데서 논란의 열기가 더 불타오른다. 근 100년에 가까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영화 역사상 최초로 게이 캐릭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독교계를 비롯, 어린이들에게 크게 각광받는 작품에 동성애 코드를 주입하는 데 반대하는 부모들이 가장 우려하는 바는 무엇일까? 당연히 이런 시도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뿐 아니라, 향후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추세라면 언젠가는 LGBT(lesbian+gay+bisexual+transgender)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 대작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도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게이 캐릭터 등장에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다.
<미녀와 야수>에는 미국의 배우이자 코미디언인 조시 개드(Josh Gad)가 연기한 르푸(LeFou)라는 배역이 등장한다. 물론 이 배역은 1991년 애니메이션판에서도 개스톤의 어리숙한 충복 역할로 등장한다. <미녀와 야수> 실사 영화는 이 둘의 끈끈한 관계를 보다 강화하여, 르푸를 동성애자로 그리고 있다.
마을 술집에서 개스톤을 칭송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1991년 애니메이션판에도 같은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번 실사 영화에서의 르푸는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는 여성스러운 몸짓들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개스톤을 이성적 감정으로 추종하고 연모하는 것으로 보이도록 연기한다.
이로 인해 이 영화는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는 개봉이 연기되고, 러시아에서는 관람등급이 16세 이상 관람가로 상향 조정됐다. 미국 앨라배마 주의 한 극장은 아예 상영 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물론 게이 캐릭터 등장에 찬성하는 측의 기세도 만만찮다. 이들은 어린이들에게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디즈니 영화에 최초로 명백한 게이 캐릭터가 등장한 사실을 환영한다.
디즈니 측에서는 감독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입장을 이미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이며, 게이 캐릭터 장면을 삭제한 새로운 편집본을 개봉하라는 요청에 완강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이는 디즈니사가 향후 제작하는 작품 전체에 동성애 코드를 삽입하는 데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디즈니사의 입장은 <미녀와 야수>의 배역을 맡은 일부 배우들의 면면을 살펴보더라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는 듯하다. 앞서 언급했던 루크 에반스는 전혀 그럴 거 같지 않은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배우임에도, 이미 영국 활동 시절부터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에반스의 미국활동이 본격화되자, 프로모터들은 그가 게이라는 사실이 경력에 방해된다고 판단했는지 관련 기사를 모두 내리고,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도 적극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2014년부터는 스페인 출신의 남자 모델 존 코르타하레나(Jon Kortajarena)와 교제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오고 에반스 본인도 이 소식에 대해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다. 이로 보건대 그가 게이, 아니면 최소한 양성애자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본 작품에서 야수의 식솔 중 시계로 변한 콕워스(Cogsworth) 역을 맡은 유명배우 이언 맥켈런(Ian McKellen) 역시 대표적인 게이 배우들 중 한 명이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과 <호빗> 시리즈의 마법사 간달프(Gandalf), 그리고 <엑스맨>의 나이든 매그니토(Magnito) 역으로 널리 알려진 맥켈런은 연극과 영화계에서의 활동뿐 아니라 인권운동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연극 및 영화 예술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으며, 1991년 기사(Knight Bachelor)에 서임되기도 하였다.
디즈니사가 <미녀와 야수>에 이처럼 굵직한 게이 배우들을 포진한 것은 향후 게이 캐릭터의 지속적인 등장에 대한,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게이 캐릭터의 주연 등장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루크 에반스가 실제로 게이라는 사실은 작중 르푸의 개스톤에 대한 동성애적 욕구를 더 실감나게 전달해 준다.
즉 이번에 개봉된 <미녀와 야수>에서 원본 동화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스톤이라는 배역의 등장은, 1991년 애니메이션판에서처럼 죽음에 대한 불안을 고조시키고 왜곡된 기독교의 광기를 폭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 코드를 이식하는 데에도 주된 목적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정도면 필자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그 가운데서도 금번 개봉한 <미녀와 야수>를 아이에게 보여줄지 말지 고민하는 이유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벨이 성에 갇히게 되는 설정의 각색도, 필자의 고민을 가중시키는 또다른 원인으로 작용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