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선택의 기준과 조건'이 있다. 능력 있고, 학벌 좋고, 인품 좋고, 다양한 자격증을 구비한 사람을 선호한다. 같은 값이면 좋은 게 좋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다르다.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을 택해서 믿음의 부자, 영적인 부자로 만들기를 원하신다(약 2:5). 그래서 우리는 한때 유행했던 인사 '부자 되세요'보다, '믿음의 부자 되세요'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
이 비밀을 알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외쳤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c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히 11:1).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들기도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아가는 비밀 통로이다. 믿음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낳는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로마의 백부장은 믿음으로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쳤다(마 8:10). 침상에 누워 지내야 했던 중풍병자는 친구들의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다(마 9:2). 두 맹인은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다(마 9:29). 가나안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은 어머님의 '큰 믿음' 때문에 고침을 받았다(마 15:28).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박을 터뜨리고 횡재하는 행운을 누렸다.
믿음은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축복의 보물 창고를 여는 열쇠이다(갈 3:9).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에 동참하게 되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오직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 기도 응답을 받는다. 오직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나의 가능성'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산다. 나의 범주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고, 주님의 범주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산다.
'믿음'은 불행한 환경을 좋고 아름답게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불신앙'은 축복을 차버린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믿지 않으므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귀를 막았고, 예수님으로부터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을 차버렸다(마 13:58).
예수님은 '작은 믿음'을 가진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으로 어려움을 당한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작은 믿음' 때문이다(마 8:26).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도 '믿음이 작기 때문'이다(마 6:30).
'환경'도 중요하다. 그러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건 '믿음의 유무'와 '믿음의 사이즈'이다. 더 큰 은혜를 누리고, 더 큰 축복을 누리려면 '믿음의 사이즈'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사이즈만큼 우리가 생각지 못한 놀라운 일들도 일어난다. '불신앙'이 최악의 환경을 만든다. 믿지 않을 때 어떤 기적도 일어날 수 없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총과 축복을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
믿음과 율법의 행함은 '기독교'를 '유대교'와 '천주교'와 갈라놓는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의롭게 되고 구원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다(롬 3:28).
그런데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도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의롭게 되고, 구원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도전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절대적으로 '오직 믿음뿐'이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무리 하고, 매 순간을 믿음으로 엮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은 필요 없는가? 폐기 처분해야 하는가? 아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갈 3:20).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다(갈 3:24).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힘쓰지 않으면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수 없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자아 절망'에서 나온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 그때부터 믿음이 시작된다.
이 세상은 어둠의 세력인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이 다스리고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을 유혹하고 방해한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은 남아 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지만, 아직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남아 있다. 그때까지는 전투적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에 약속을 받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하다(히 10:36).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현장에 파송하면서 예수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니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경고하셨다(마 10:22).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마 10:28).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고 두려워할 건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니까(요일 5:4). <죽으면 죽으리이다>를 쓴 故안이숙 사모님의 이야기다. 교사로 봉직하던 그녀가 20살 때 일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 순사는 그녀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춧가루를 물에 타서 콧구멍과 눈에 넣으며 온갖 고문을 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워커발로 젖가슴을 짓밟고, 옷을 찢고, 온갖 횡포와 말할 수 없는 회유를 다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오직 주님만 섬기겠다고 고백했다.
그러면 일본 순사가 다시 안이숙 여사를 지근지근 밟았다. 그때 안이숙 여사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이미 우리 주님께 절을 해버렸습니다. 그러니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절할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께 나의 신앙의 정조를 드렸습니다. 나는 일본 신사 앞에 바칠 정조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값없이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피 흘리기까지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한다. 믿음의 싸움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 끝까지 견뎌야 한다. 믿음은 우리를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더해준다. 성령께서 뒤로 물러나지 않게 도우실 것이다. 투쟁에서 지치고 힘들 수 있다. 그때마다 예수님에게 집중해야 한다(히 12:2).
어렵고 힘들 때마다, 불안하고 답답할 때마다, 억울하고 속상할 때마다, 고통의 순간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미 사단의 권세를 꺾으셨고, 죽음과 무덤을 정복하셨다. 율법과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예수님의 승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길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셔서 승리케 하심을 믿고, 내 삶을 주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오직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