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는 성경을 사제나 교황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평신도들은 성경을 소유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어려운 라틴어로 되어 있어 성경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성경을 잃어버렸고, 사탄에게 빼앗겼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예전을 앞세우게 되었고, 교회의 생명력과 능력을 잃고 말았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목이 곧은 이단'으로 정죄당했다. 1408년 켄터베리에서 대주교 아룬델은 이런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성경의 어느 텍스트든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빼앗긴 성경을 되찾아 주인에게 돌려준 운동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 위한 몸부림을 쳐야 한다. 말씀을 멀리 두고 있는가? 말씀이 잘 안 들리는가? 말씀대로 순종하는 게 어려운가? '오직 성경'을 회복해야 한다.
왜 성경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가? 성경은 적어도 이래서 중요하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안내서이다(딤후 3:15). 하나님의 사람을 성숙으로 안내하는 책이다(딤후 3:17). 성도의 삶과 생활의 규범이다. 성경은 영혼의 양식이다. 육신은 음식을 섭취해야 건강해진다. 영혼은 영적인 양식인 성경을 먹어야 건강해진다. 성경은 '등'이요 '빛'이다(시 119:10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살전 2:13).
세상에는 사단의 소리,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섞여 나온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롬 10:17).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었다(눅 19:48)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족들을 한 곳에 모아서 베드로를 초청했다(행 10:33).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고 성결하게 된다(딤전 4:5).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도록 내어주어야 한다(엡 5:26). 다윗은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행하려고 애썼다(시 119:165). 예수님처럼 기록된 말씀으로 사단을 대적해서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것이기에, 예레미야는 주의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고백했다(렘 15:16). 다윗은 주의 말씀을 금이나 정금보다 사모했다(시 19:10). 종교개혁자 루터 역시 성경을 양보하지 않았다. "비록 내가 성경 때문에 몸과 생명을 잃을지라도, 나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날 수 없다." 링컨이나 워너메이커도 성경 사랑에 푹 빠졌다.
성경이 이렇게 중요하고 유익한 것이지만, J. I. 패커는 이렇게 탄식한다. "오늘날 성경을 믿는 사람은 많지만, 읽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나는 과연 성경과 얼마나 가까운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는가?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성경을 잃고, 듣고, 큐티를 잘 한다고 할지라도, 그 성경에 의해 실제 삶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D. L. 무디는 "성경은 정보를 위한 책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책"이라고 역설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변해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다고 자동적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다. 성경의 4가지 기능에 제대로 '반응해야' 변화가 일어난다(딤후 3:16).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게 허용해야 한다.
이제부터 성경에 굴복하는 실천적인 삶을 점검해 보자. 역주행을 하면 진짜 큰일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게 '역리'이다. 역리의 길을 걷지 않고 순리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때로는 성경이 이성과 충돌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논리와 합리성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때 이성을 따르지 않고 성경을 따라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아프고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말씀이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태도로 들었다.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겔 33:30)." 이런 태도로 들으니 제대로 들릴 리가 없다. 영향을 받을 리가 없다. 변화가 일어날 리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마음과 영혼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살전 2:13). '성령의 기쁨으로' 받으면,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살전 1:6).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가져오려면, 말씀을 '머리에 담는 지식'으로 간직하지 말고 '가슴에 새기는 진리'로 만들어야 한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가는 게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가져가지 않고는 아무런 영향을 받을 수 없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말씀 그대로 순종할 때 머지않아 작은 예수로 변해갈 것이다. 오리겐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순종하려는 열심 때문에 스스로 고자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겔 33:31). 하나님 말씀은 들을 뿐 아니라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이다(마 7:24).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가 율법을 들려줄 때 '말씀대로 행하겠다'고 약속했다(스 10:3, 19). 그래서 율법대로 이방인과 헤어지기 위해 가정까지 깨뜨렸다. 율법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특권을 누렸다(롬 3:2).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 불행한 일이 닥쳐온다.
때때로 성경말씀이 부담스럽고, 불편할 때가 있다. '불편하게 하는 말씀'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으러 온 부자 관원은 '불편하게 만드는 말씀' 앞에서 실패했다(눅 18:22-23). 그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불편하게 만드는 말씀 앞에서 성공했다(마 15:21-27). 자존심과 감정을 상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은혜 베풀기를 간청했다.
베드로는 합리성이나 경험, 전문적인 지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씀을 의지하여"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졌다(눅 5:5).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불편한 말씀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다(눅 1:38). 아브라함은 언약의 말씀을 받은 후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움직였다(창 12:4).
우리는 율법대로 살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 율법의 요구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겔 36:27). 이제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 수 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