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칼럼] 오직 십자가!

|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역사학자 필립 샤프는 예수님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글 한 줄 쓰지 않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위인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펜을 움직였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그의 십자가였다. 그의 모든 영향력의 비밀은 그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고 희생함으로 그는 인류역사에 불멸의 영향력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지금까지 인류가 진군했던 모든 군대와 지금까지 세워진 모든 나라, 의회, 모든 왕을 합해도 그의 거룩한 영향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는 인기가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당시 군중들이 바라본 십자가는 비웃음과 조롱거리였다. 희망을 갖고 따라다녔던 사람들에게조차 배신감만 안겨주는 절망이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 철학자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다(고전 1:22-23, 18). '거리끼는 것'은 '덫'이나 '함정'을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들에게 실족하게 만드는 덫이나 함정이 되었다.

'미련한 것'의 원형인 '모리아'에서 유래된 단어가 영어의 moron, '저능아'이다. 당시 십자가의 메시지가 이방인에게는 지능이 떨어지는 정신박약아 같은 사람들이나 하는 멍청한 소리로 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 2:6-8).

일개 로마 시민이라도 법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될 수 없었다.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이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라고? 유대인의 왕이요, 세상의 왕이라고? 어느 누가 이런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겠는가? 그러니 유대인도, 헬라인도, 로마인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궤변이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전했다. 왜?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고전 1:18).

당시 로마에서 일년에 약 30만 명 정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들 대부분은 정치범이나 흉악범이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전혀 다르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는 분으로서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죽으셨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이 못 박혀 죽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로 고안된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근본 문제인 죄를 해결했다(요일 1:7). 100% 인간이요, 100%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만 인간의 죄가 해결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다(히 2:14).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사탄의 머리를 박살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죄인의 생명을 대신한 대속의 죽음이다(벧전 2:24).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대신 죄값을 치루셨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셨다(엡 1:16).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인 동시에(롬 5:8), 하나님의 공의의 증표이다(롬 5:10).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어리석다, 약하다'고 조롱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했다(고전 1:25). 십자가에 어리석고, 약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변했다. 달라졌다. 우리 역시 변한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알기로 작정한다(고전 2:2). 자신을 유익하게 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기 때문에(빌 3:8).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는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으로 변한다(갈 2:20).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욕을 당하되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되 위협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살기 때문이다(벧전 2:22-23). 억울하고 속상할지라도 맞서지 않는다. 앙갚음하려 하지 않는다. 보복의 칼을 갈지 않는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보상하시고, 악한 자를 징벌하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자랑거리가 달라진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고백했다(갈 6:14). 예전처럼 많이 배운 학벌이나, 좋은 문벌, 종교적 의로움을 자랑하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 서니 이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배설물에 불과할 뿐이다.

십자가를 경험하면 연약함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예수님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고후 13:4). 그러니 약함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십자가를 경험한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한 존재로 던져두셨다. 십자가에서 잔인하고 처참하게 죽게 버려두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셨다(히 2:9). 고난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잠시 동안임을 안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것 없다.

십자가를 경험한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간다(마 16:24). 힘들다고 십자가를 집어 던지지 않는다. 자존심 상한다고 앙탈 부리지 않는다. 기분 나쁘고 짜증난다고 십자가를 집어 던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간다. 예수님이 원하는 일을 한다. 끝까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져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었음을 알기에.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고난과 죽음의 순간에 부활의 영광을 바라본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진짜 십자가를 경험했는가? 그렇다면 이제 십자가 신학에 머물지 말고, 십자가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다. 한낱 평화의 상징만이 아니다. 십자가는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다. 십자가는 생명이다.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요 동력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아이디어이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완벽한 하나님의 아이디어이다.

우리 주변에는 십자가를 부르짖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짜 체험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십자가 신학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십자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십자가를 진짜 체험해서 삶이 변해가는 참된 제자가.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많이 본 뉴스

123 신앙과 삶

CT YouTube

더보기

에디터 추천기사

바이어하우스학회

“북한 열리면, 거점별 ‘센터 처치’ 30곳부터 세우자”

지하 성도들 단계적 준비시켜 각 지역별 사역 감당하게 해야 과거 조선족 교회 교훈 기억을 자치·자전·자립 네비우스 정책 주신 각 은사와 달란트 활용해 의료와 복지 등으로 회복 도모 제10회 바이어하우스학회(회장 이동주 교수) 학술 심포지엄이 4월 11일 …

이세종 심방

“심방, 우리 약점 극복하게 하는 ‘사역의 지름길’”

“열 번의 단체 공지보다 한 번의 개인 카톡이 더 효과적이다. 열 번의 문자보다 한 번의 전화가 더 효과적이다. 열 번의 전화보다 한 번의 심방이 더 효과적이다.” ‘365일 심방하는 목사’ 이세종 목사의 지론이다. 저자가 시무했던 울산교회 고등부는 심방을 …

대한성서공회

지난해 전 세계 74개 언어로 성경 첫 번역돼

성경전서는 총 769개 언어 번역 아직 전체 48% 언어 번역 안 돼 새 번역된 74개 언어 중 16개는 성경전서, 16개 신약, 42개 단편 2024년 말 기준 세계 성서 번역 현황이 발표됐다. 전 세계 총 7,398개 언어 중 성경전서는 769개 언어로 번역됐고, 지난 1년간 74개 언어로 처…

이 기사는 논쟁중

인물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