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도 아니다. 불안함도 아니다. 그런데 마음이 착잡했다. 나의 운명의 시간이 정해졌다. 밤 12시.
드디어 밤 10시가 되었다. 아내는 옆에서 잠을 잔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니 안쓰럽다.
내 앞에는 아무 것도 적혀지지 않은 커다란 전지가 놓여 있다. 무엇인가 써서 남겨놓아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펴놓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는데도 아무 글도 나오지 않는다. 글쟁이인데도. 그저 여기저기 긁적거릴 뿐.
10시 30분이 되었다. 나는 애써 글을 쓰려 했다. "이제 1시간 반만 지나면...."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자고 있던 아내가 부스스 일어났다. 내 앞에 놓여 있는 전지가 이상한 듯 눈물 부비며 쳐다보았다. "이제 1시간 반만 지나면...."
아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 가슴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함이 몰려오는 순간, 나는 잠이 깼다. 꿈이었다. 지난 수요일 새벽에 꾼 꿈.
꿈을 깨는 순간, 나는 내 자신에게 실망스러웠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내가 기대하던 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듯, 나도 죽음 앞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아서 나는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고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폼 좀 재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두려움이나 불안함은 아닐지라도, 뭔가 착잡한 심정에 젖어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게 싫었다.
평소 꿈을 꾸었겠지만,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나이다. 어떤 때는 꼭 기억하고 싶은데, 일어나면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래서 속상할 때가 있다. 그런데 오늘 꿈은 너무 생생하다. 아침에 출근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광경이 생생하다.
내가 그 꿈을 꾸게 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어제 오후 기도시간이었다. 며칠 전 담도암을 발견한지 4개월 만에 하나님께로 간 목사님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김포에서 개척한 지 20년. 두 차례 예배당을 건축하고, 출석교인 2,000명 정도 될 정도로 목회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내와 두 아들을 둔 채 56세의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나이에. 나는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기도했다.
어제 나는 또 한 친구 목사님을 위해 기도했다. 개혁주의설교학회에서 함께 섬기는 목사님이다. 어제 아침 어느 대학병원에서 수술했다. 전립선암 때문에. 나는 격려 문자를 날리면서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있도록. 그 외에도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암환자들과 여러 환우들을 위해 기도했던 어제. 내 마음은 죽음의 문턱을 오가고 있었던 것 같다.
또 하나 있다. 어제 저녁에 수요일인 오늘 새벽설교를 묵상하며 잠이 들었다. 새벽기도 본문은 누가복음 22장 1-13절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흥정을 하는 내용과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눌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도록 시키시는 장면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의 착잡한 심정 앞에 선 것이다. 세례 요한도 알았고, 예수님 자신도 알았던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 그렇다면 이제 밤이 지나면 세상 죄를 짊어지는 어린 양이 죽을 때가 된 게다. 목요일 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나면 예수님은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원수들의 손에 넘겨진다.
그런 시점에 3년 동안 제자훈련을 시켰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생각으로 대제사장들과 흥정을 하고 있다. 은 30인 노예의 몸값으로! 3년 동안 따라 다녔던 스승을! 너무너무 괘씸하게. 비참하고 참담한 심정을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할 예수님은 끝까지 자기 사람을 사랑하셨다. 가룟 유다마저도 돌이킬 기회를 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썼다. 어떻게 저러실 수 있지? 하나님 자신이 죄인인 인간에 의해 배신당하면서.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1시간 30분만 지나면 죽음의 문턱을 넘는 찰라가. "1시간 반만 지나면..."이라는 글을 쳐다보며 눈물 흘리던 아내의 모습이. 인생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 전지를 들고 앉았던 착잡한 내 모습이.
언젠가 이 죽음의 문턱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때 나는? 그날이 다가오기 전에 아내를 더 사랑해주리라. 후회가 남지 않도록. 결혼할 때 약속했던 것처럼!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고 가노라고 말할 수 있게.
그때는 죽음의 문턱에서 새로운 생명의 환희에 설렜으면 좋겠다. 이 세상을 두고 떠나는 것에 미련 없는 내가 되었으면 좋으리. 가족에 대한 염려와 아쉬움마저도 다시 만날 그날이 있다는 소망 속에 묻어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과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진 존재로 다 누리지 못한 교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음을 기대하며, 당당하게 가리라.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잔인하고 처참하게 죽으신 주님의 얼굴을 더 확연히 뵙기 위해.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