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영혼도 사회도 함께 새로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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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주 칼럼] 존 웨슬리의 선교 연구(3·끝)

3. 웨슬리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신학적 입장

존 웨슬리가 한 세기를 살아가면서 전 생애를 투자했던 사역 목표는 인간의 영혼 구원이었다. 부패한 인간이 죄악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새 사람이 되고 새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철저한 회개운동은 당시 부패의 절정에 달했던 영국 사회를 정화되게 했던 것이다. 그는 일부 도덕무용론적인 경향을 띈 칭의 신앙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몰입하고 사회도덕에는 무책임한 기독교 신비주의를 경고했다. 웨슬리는 세계 선교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가장 훌륭하게 시행한 하나의 샘플이 되는 선교 사역자였다.

웨슬리는 기독교를 사회적 종교로 이해했다. 은둔주의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온유와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조성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지 아니하고, 복수 대신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으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미워하는 자에게 선행을 하며, 모독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의를 위해 수난을 당하면서 악을 선으로 이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최후에 구원을 얻든지 못 얻든지 관계없이, 그들이 배고플 때 먹이고 헐벗었을 때 입힘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우리의 거룩한 성품과 말과 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이 세상의 부패성을 다소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사업이다(행 10:4; 사 58:6).

물론 웨슬리는 율법에서 난 의와 믿음에서 난 의를 분별했다. 칭의 전 선행이 어떤 의미에서는 선행이며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좋은 것도 아니고 유익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나온 것도 아니므로 죄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 선행은 칭의 후에 따르는 것이다.

웨슬리 자신이 신생의 체험 이전에도 선행을 계속 했던 것처럼, 선행은 항상 권장되어야 한다. 비록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칭의 전 선행을 기억하셨다.

18세기 웨슬리 당대의 영국은 공업화 및 산업화로 인한 저임금 노동, 실직과 좌절, 국교의 영적 침체, 종교적 타락, 도덕적 부패 등으로 사회변혁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시기였다. 이때 웨슬리는 설교를 통해 악을 샅샅이 드러나게 하고 회개케 함으로써, 술 주정꾼, 매춘부, 도둑 등의 죄인이 거룩한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사실상 웨슬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활동은 그의 회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대학 시절 '규칙쟁이(Methodist)'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는 그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별명에 대해 그는 "우리의 할 일은 독서와 금식, 기도와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교회참석과, 성찬식을 거행함과, 빈민 구제와, 병자와 수인의 방문과, 무학자의 교육, 악인의 회개를 전하는 것 등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지나치게 했다는 것뿐이다"고 한 변명에서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시작했던 구제운동은 그가 1777년 12월 10일 미스 마아치에게 쓴 것처럼 "병자나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는 시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마지막 날 이스라엘 목자가 자기 양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표지"이므로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만 각성운동을 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모범적인 생활을 하여 사회의 본이 되었다. 그의 활동에 소요된 기금은 일년간 3,000파운드 이상이 되었으나, 그 자신을 위해서는 연간 30파운드 이상도 이하도 받지 않았다.

그는 73세의 노인으로써 그의 은 그릇 세금부과 보고 공문을 받고서 런던에 은차 숟갈 두 개와 브리스톨에 두 개가 전부임을 밝히며,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한 더 사지도 않을 예정"이라고 보고했다. 그는 한번도 헌물을 스스로 받은 적이 없었고, 다만 그것들이 어떻게 쓰이는가를 감독했을 뿐이다.

그는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가난한 자와 함께 보냈고, 하루에 100-150명의 극빈자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1751년 웨슬리는 동생 찰스에게 "나는 항상 돈에 시달려 왔다"고 고백했으나, 돈이 들어왔을 때도 그는 누이 홀부인에게 "나는 가난한 이를 위한 하나님의 청지기다. ... 돈은 내게 없단다. ... 나는 생기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남에게 줘 버린단다. 내 마음 속까지 뚫고 들어올까 두렵기 때문이다"고 하며 누이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

한편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토끼를 쏘거나, 어린 나무를 자르는 일, 5실링의 도둑질 등으로 목을 매달고 공개처형을 당하는 형벌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지옥 같은 감옥소와 불공정한 변호사, 전쟁 죄수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등을 폭로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죄수 및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회개로 이끌며, 그들에게 믿음과 내적 평화를 심어 준 전도자였다. 웨슬리는 감리교 신도회가 교도소를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Thoughts Slavery'라는 논문을 통해 단호히 노예의 인권을 위한 기독교 윤리를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노예해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월간지 Monthly Review 발행인에게 '노예무역의 비인간적 대우'에 관하여 고발한 내용 중에는 윌리암스버그 가젯 신문에서 '도주한 흑인 노예 밥(Bob) 머리를 가져오면 10파운드, 생포에 40 파운드', 노드 캐리라이너 신문 내용 중 '옙(Yeb) 머리를 가져오면 20 파운드, 생포해 오면 25 파운드'라고 적힌 내용이 있었다. 이 밖에 웨슬리는 마약, 사치, 알콜중독, 국회의석 매매, 뇌물 등과 같은 죄악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쿠바르트는 웨슬리를 사회의 구조적 변혁을 포기한 사람, 법률을 개정하거나 국회의 개혁을 요구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왕에게 대한 비판을 자제한 하나의 '비정치적 보수주의'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그 시대 최대의 사회변혁가'였다고 평가했다.

웨슬리는 사회적 책임감이 미달되는 하나의 폐쇄적인 복음 전달자였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오히려 그의 설교가 개인 회심으로 끝나지 않고, 회심자의 개인윤리적이고 사회윤리적인 완성과 성화를 촉구하여, 가장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회개혁을 감행한 사람이다. 웨슬리 후의 어느 감리교인도 그 만큼 사회변혁을 시도한 사람은 없다.

만일 웨슬리가 그의 정력을 회심운동에 쏟는 대신 법률개정이나 국회 개혁, 구조악의 제거를 위한 정치. 경제적인 해방운동에 쏟았다면 그것은 하나의 무력시위로 발전됐을 것이고, 한 사람의 사회운동가는 될 수 있었겠지만 결코 그가 성취할 수 있었던 사회변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성공적인 사회개혁은 개인의 회심과 변화를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 아무리 급해도 복음화보다 앞설 수는 없으며, 한 인간에게서 지나치게 모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을 양육하고 복음 전도자로 파송한 점은 기독교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케 한다.

웨슬리는 복음화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가장 훌륭하게 시행한 하나의 샘플이 되는 선교 사역자였고, 한 세기 동안 하나님이 그 뜻대로 사용하셨던 놀라운 그릇이었다.

결어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신학은 고등교리적 체계를 세운 하나의 사상체계라기보다, 복음을 효과 있게 선포하여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위해 가르쳐진 선교학이다. 신학의 목표가 '복음'을 전해 '믿고 구원 얻게 하는 일'이라고 정의한 한철하 박사의 주장과 같이, 영국 사회와 교회의 타락에 반사 작용으로 발생한 청교도적인 엄격한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철저하고 전폭 헌신적인 신앙생활은, 대학 시절 규칙쟁이라는 조롱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터 위에서 얻은 경건주의적 중생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영국에 큰 각성 운동과 사회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의 성경적 신앙과 중생에 의한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그의 조직력과 성결운동은 감리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기반 위에 견고히 서게 했다.

합리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적 배경에 의해, 그는 신비주의와 합리주의를 둘 다 배격하게 되었고, 오히려 성도들의 실천력을 강화하여 피동적 신앙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만민을 구원하려는 열심을 품과 선교와 복음화 운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의 선교는 오늘날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무수한 명목상 기독교인 문제와, 사회적 책임에 관한 시급한 질문에 해답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참 신앙인과 성결한 사람이 되면 영혼도 사회도 함께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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