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주 칼럼]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과 선교 사역 上
서론
선교와 봉사와 사회변혁에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존 웨슬리의 생애는 사실상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목표를 위해 바쳐진 생애였다. 선교신학자 케인(H. Kane)은 웨슬리에 관하여 "회심을 체험한 직후부터 전도사역을 시작하였는데, 선교사역에 있어 아마 가장 위대한 사역을 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전도는 40년간 계속되었으며 하루에 평균 3-4회의 설교를 하였던 것이다", "그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파멸되어 가던 영국을 건지고, 케리에 의해 출발된 근대적 선교운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라고 그의 책 <기독교 세계선교사>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교회성장 운동과 사회정화 운동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한국교회의 무기력화, 세속화,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며, 점점 타락해 가는 한국 사회적인 도덕성에 직면하여, 영국 초기 감리교회의 성장 실태와 웨슬리 선교활동의 목표를 검토 하면서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재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웨슬리를 신학자적인 대상으로서 보다는 선교 사역자적인 대상으로서 우리는 ①복음주의 운동, ②사회변혁 운동, ③교회연합 운동의 세가지 범주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1. 웨슬리의 선교와 복음주의
먼저 우리는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진보주의 내지 자유주의 신학이 더 우세한 우리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복음주의라면 알르레기 반응을 이르키기도 하고 "아멘, 할렐루야!"와 비슷한 개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리회의 기초교리는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믿는 복음주의이다. 이 교리는 존 웨슬리의 설교와 찬양집과 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에 설명되어 있다"고 한국 감리교회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옳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주의라는 개념이 먼저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1) 복음주의 개념 정의
복음주의라는 개념은 개혁자들의 개념으로부터 시작하여, 경건주의와 영·미 대각성운동에 걸쳐, 현대의 비복음주의적 운동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미국의 근본주의 등. 세계 복음주의 운동들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폭넓은 개념이다. 16세기에 영국에서 사용된 '복음주의(Evangelical)'란 종교개혁자들을 일컬은 말이었다. 독일어로 Evangelisch라는 말과 같다. 즉 Luther교인들과 개혁주의자들을 포괄적으로 일컬었던 개념이다.
첫 Evangelisch라는 개념은 반개혁자들이 개혁자들을 Martin Luther의 이름을 따서 Lutheraner 또는 Martinaner라고 칭했는데, 1521년에 Luther가 이것을 Evangelisch라고 고쳐 불렀다. 이와 같이 초기의 Evangelical이라는 개념은 개신교(Protestant)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 후에 18세기 영국에서는 의식보다는 복음을 존중하는 Low-Church와, 감리회 운동, 그리고 모든 각성 운동들을 포함한 초교파적 성격을 띤 개신교 운동들을 Evangelical이라고 하였다. 미국에서는 같은 시대에 일어났던 독일의 경건주의를 Evangelical이라 하였다. 그리고 19C에는 모든 복음주의자들의 공동체인 Evangelical Alliance(1846)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사용하는 Evangelical이란 말은 18C에 영국에서 사용되었던 의미와 같다.
그 후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화 신학의 반동으로 일어난 현대 복음주의 운동들이 있다. 그것은 미국의 근본주의와, 이와 비슷한 선교단체인 IFMA(Internationa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 1917), Carl McIntire의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1948)등의 복음증거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그리고 성경적인 기초위에서 현실문제를 다루며 신학적인 연구와 여러 타교회들과의 협력을 꾀하는 'New Evangelicals', 그리고 이와 비숫한 성격을 띤 EFMA
(Evangelical Foreign Missions Association 1945)가 있다.
특히 20세기 후반기부터 비성서적 현대 세속화 신학의 발전과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신학사조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복음주의 운동이 있다. 이들은 1966년 WCC 내 '교회와사회협의회'에서 혁명신학이 주창되던 해에, 미국에서 Wheaton 선언문을 발표하고, 제4차 WCC 총회(1968년)에서 '세속화 신학'이 절정에 달아오르자, 독일에서 Frankfurt선언문을 냈다(1970년). 1973년 WCC의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WME)'에서 세속화 신학과 종교혼합주의가 강세로 진행되자 복음주의자들이 스위스 로잔에서 'Lausanne 언약'을 발표하면서(1974년)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그릇된 흐름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복음화를 결코 중지할 수 없는 우선적인 과제로 인식하면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곤 하였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다섯 명의 세계복음주의 선교신학자들은 보통 미국의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ean), 영국의 존 스토트(John R. W. Stott), 독일의 피터 바이어하우스(Peter Beyerhaus), Georg F. Vivedom를 꼽는다. 그들의 특징은 다섯 가지이다. 첫째 성서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둘째 개인적인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 셋째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는 성령에 대한 신앙, 넷째 모든 민족과 나라를 위한 선교와 복음화 및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지,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다.
그 밖의 세계복음주의 단체로는 각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가 있어 세계복음화와 사회적 책임에 관해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존 웨슬리가 2세기 전에 영국에서 시작한 복음주의 운동과 병행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웨슬리의 복음주의적 선교에 관하여 고찰해 보자.
2) 웨슬리의 복음주의 선교
웨슬리 선교의 기초는 그의 회심일(1738년 5월 24일)을 기하여 변화되었다. 회심 이전에 그는 합리주의적인 신학을 바탕으로 이성만을 진리의 유일한 척도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믿음을 "합리적인 근거에 대한 동의"라고 생각하고 "믿음은 필연적으로 이성에 귀착되어야"한다고 그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조지아로 선교하러 떠나면서(1735년) 옥스포드 대학교 학감이었던 John Burton박사에게 편지하기를, 그는 인디안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할 뿐아니라, 또한 이렇게 함으로 자기 영혼이 구원받기를 위함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선교라는 "노력의 대가"에 의해서 자기에게 구원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의 회심일로부터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구원이 노력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그는 비로소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고백하게 됬던 것이다.
그후 웨슬리는 그의 논문 "이성적이며 종교적인 인사들에게 대한 간곡한 호소문"을 통해 "죄인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기 위해서 무엇인들 못하며, 무슨 고생인들 사양하겠는가?"라고 고백하면서 그의 사역자들에게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일도 하지말라"고 분부했다. 제1차 연회에서도 감리교 대표들은 그 사역의 목적을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 밖에 다른 것은 원치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웨슬리와 감리회의 선교목적은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제4회 연회는 그 목적을 "우리의 사명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방황자들이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 대신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특별히 큰 길이나 울타기 밖에 나가 억지로라도 그들을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눅 14:23)"고 하는 강한 영혼 구원에 대한 사명감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감리교회의 본래적 사명과는 달리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들을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 같이 자녀로 불러주셨다"고 하며, "만약 구원된 인간을 불러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이제 세상에는 크리스천 아닌 사람이 없다. ... 그리스도 계신 곳이 교회라고 한다면 세계는 온통 교회로 변했다고 주장하는 현대 감리교회 내 반선교적 진보사상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회심 후의 웨슬리는 과거의 사변적 신앙관을 버리고 이성이 계시의 주인이 아니라 계시 그 자체가 출발점이라고 하며, 다만 "성서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서는 ①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그릇됨이 없는 진리이며(infallibly true)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②구원받기에 필요한 진리가 충족히 포함된 구원의 도구이며 ③하나님의 계시이며 모든 진리의 최고 권위였다.
하나님의 영이 현재도 간절히 기도하며 성서를 읽는 자에게 과거와 같이 계속적으로 감동하시고(continually inspires), 초자연적으로 도와주심을 인정하였다. 그는 성서를 성서적인 맥락에서 이해했으며, 성서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면서 성서의 통일성을 발견하였다.
웨슬리는 "성경과 신조가 진실되다고 믿는것"과 우리가 영원한 저주에서 구원함을 받는다는 확신이 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면서, 성경 중에 일부만을 받아들인 신앙에 관하여 경고하였다. 즉 "마귀도 ... 그리스도를 처녀에게서 났다는 사실과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과, 그 자신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신 사실과, ...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맛보셨다는 등을 믿으며, 또 신구약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는다. ... 그러나 이런 모든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마귀이며, 그들은 참된 기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여전히 저주아래 있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만인속죄론"을 주장하였으나, 그것은 위의 현대 만인구원 신학과 같은 불신자의 자동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고, 죽으셨고, 속죄하셨다는 뜻이며, 그 주님이 "어디서나 누구든지 다 회개하라고 명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믿는자는 구원을 받되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뜻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은 불신자를 그대로 포괄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을 유일한 조건으로 한 구원관이다. 그는 "불의한 자들이 부활후에 지옥에서 영원히 고난을 받을 것과, 의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형언 할 수 없는 복을 누릴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웨슬리의 신학은 철저히 성서적 기초위에 서 있고 복음적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는 "한 책의 사람" (homo unius lbri)이었다. 성서적 문맥에서 떠난 해석을 하지 않았고, 그 통일성 안에서 성서를 이해하고 그것을 선포하였다. 그는 성서적 맥락에서 뜯어낸 복음이나 "파괴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 아니다.
웨슬리의 선교 메시지는 성서적이고, 체험적이며, 이성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지주의나 체험주의 내지는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복음주의자였다.
3) 평신도 선교
교권주의와 형식과 제도에 매여 있는 국교를 배경으로한 웨슬리가 여러 모양으로 전통적 교회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사역을 감행할 수 있게 했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급속도로 신도회(Society)가 확장되며, 따라서 확대되는 신도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평신도 사역자를 대폭 등용하고 여성인력을 사용하게 된 그의 판단기준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며 세계복음화와 선교를 위해 혼신을 다한 그의 선교목적에 있었다. 강력환 영혼구원의 목표가 그의 판단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평신도 사역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웨슬리 생존시에 모였던 12만 명이라는 최종 연회(1790)의 감리교회의 통계숫자가 결코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웨슬리가 평신도를 사역자로 등용하게 된 동기는 그의 모친 수산나에게 있었다. 웨슬리는 전도여행을 떠날 때마다 신도회를 맥스필드(Thomas Maxfield)에게 맡겼는데, 그는 성경을 읽고 설명하다가 그만 회중들에게 설교를 하게 됬던 것이다. 존은 이 소식을 듣고 불쾌한 마음으로 급히 돌아왔다.
그때 수산나는 거리낌 없이 아들에게 맥스필드의 일을 좋게 생각한다고 실토하며, "그도 너와 마찬가지로 확실히 설교하도록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변호해주었다. 존은 실로 맥스필드의 설교를 듣고 나서 어머니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40년에는 감리교의 첫 공식적 평신도 설교가 시행되었고, 그후로 복음은 평신도들의 사역에 의해서 전 세계로 확장하게 되었다.
1744년에 개최한 첫번째 연회는 평신도 직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평신도 사역자는 교역자가 없는 경우에 양떼를 먹이고, 지도하고, 가르치고, 다스리되 ①조석으로 그들에게 성경말씀을 해석해 준다 ②매주 연합신도회와 소회, 선발 신도회와 참회자반을 소집한다 ③각 속을 월 1회 방문한다 ④신도간의 이견을 듣고 조정해 준다 ⑤말썽을 일으키는 신도를 삼사하여 시정해 주고 소회나 신도회에서의 제소를 받는다 ⑥집사나 지도자들이나 선생이나 건물관리인들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하는가를 살핀다 ⑦집사와 소회의 지도자를 매주마다 만나고 그들의 회계장부를 검사한다 등 그 사역 범위를 설명하고 있다.
1746년 연회록은 "선교에 알맞는 목회"를 위한 설교자의 지침를 내놓았는데, 그 지침서에 의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설교를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감리교회 설교자는 아래의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했다.
①하나님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그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졌으며, 하나님 밖에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람, 대화의 자세가 경건한 사람 ②사역을 위해 은사와 은총을 받은 사람과, 인정받을 수 있는 분명하고 건전한 이해력을 지니며, 하나님의 것에 대한 바른 판단과, 믿음에 의한 구원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말솜씨가 있고, 바르고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사람 ③열매가 있고 그들의 설교를 통해 회개한 사람이 있는 경우이다. 이와 같이 감리교회는 처음부터 칭의의 신앙과 회심과 영혼구원과 복음을 선포하는 복음주의였으며, 평신도 사역자들이 받은 은사대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놓음으로서 세계선교는 힘차게 뻗어 나갔던 것이다.
우리 감리회 평신도 사역의 기초가 수산나의 선교적 열정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나에게 20명의 자녀가 있다면 그들을 다 선교사로 보내겠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라며 세계선교에 대한 선각적인 소원을 고백했던 것이다.
웨슬리가 여성의 힘을 선교자원으로 사용하게 된 동기 역시 그의 모친에게 있었다. 남편 사무엘 목사가 오래동안 집을 비우는 동안 교회에서는 오후 예배를 드리지 않았으므로, 수산나는 부엌에서 하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시편과 기도문 및 설교문을 낭독해 주곤 했다. 그 예배가 확대돼 친구들과 이웃들이 참여하여 200여 명 넘게 되었다. 그때 그의 사역에 관하여 부목사인 인맨이 찬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저녁 비밀집회"를 해체하라고 수산나를 위협했다. 그것을 안 남편 사무엘도 '부엌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만류하였다.
그러나 수산나는 이에 관하여 단호했다. 오히려 부목사에게 교단적으로 공식 명령하기 전에는 응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남편에게도 "가족에 속한 영혼들에 대한 최고의 책임이 가장이요 성직자인 당신에게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안계실 때도 당신이 나에게 맡겨준 모든 영혼을 나에게 위임된 달란트로 돌보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당신은 기도문을 다른 사람에게 읽도록 하셨지만... 나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설교문 한토막을 더듬거리지 않고는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 가운데 어떤 사람도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들릴 만큼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당신이 이 모임을 해체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당신은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내 양심에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선을 행할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당신과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두려운 법정에서 서게 될 때, 나의 모든 죄와 형벌을 면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이 충실하고 분명한 말로 나에게 긍정적인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라고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부엌 집회'는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지속되었고, 수산나는 그 집회를 '우리 신도회(Society)'라고 칭했다. 웨슬리가 그의 공동체를 감리교 신도회(Methodist Societies)라고 호칭한 것과 병행된다. 실로 수산나는 감리교 선교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진다.
그후 감리회에서 허락 받은 여성 설교자는 Saran Grosby였다. 그는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남편이 사망한 후에 설교하고 목회했던 Mary Bosanquet도 있다. 웨슬리가 그를 하나님의 특수한 부르심(extraordinary)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1787년 소경이며 귀머거리였던 여성 설교가 Sarah Mottet을 여성 설교자로 공식 인정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능력있는 영적 설교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솔직했던 웨슬리는 전도하지 않는 어떤 권위나 제도도 과감히 개혁할 수 있었다. 그의 비판 척도는 그 일이 선교와 영혼 구원에 유익한가에 있었고, 그 일을 하나님이 진행하신 것인가라는 영적 분별력에 있었다.
4) 부설: 현대교회 여성사역과 선교
1989년 가을학기 필자가 시무하던 합동신학교에서 '여성교역'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던 해에, 교내에서 여성의 설교 사역에 대한 논쟁이 크게 일어났다. 그때 여성 설교를 가장 강력하게 거부하던 한 성서신학 교수의 조교 아내가 되는 2학년 여학생이 기말고사 마지막 문제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소견을 적으라.
답) "... 성경의 주장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여성사역은 불가능한가? 이번 학기를 시작할 때 여성 사역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혀 갖지 못하고 과목에 임하게 되었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여성일지라도 교회와 성도를 섬기도록 나를 쓰실 것이라는, 언제가는 내가 그들에게 도움과 가르침으로 유익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여태것 가져왔지만, 이러한 생각이 송두리채 무너진 기간이 바로 이번 학기였다.
여성에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허용되었는가의 근원적 문제부터 시작하여, 가정 생활에서 충실하고, 가정의 영역에서 섬기는 것이 여성의 최대의 봉사, 섬김이 아니겠느냐는 제안을 듣는 것까지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러한 문제들이 명쾌하지 않으나 가닥이 조금씩 잡혀가는 것 같다. ..."
이 답안지는 물론 필자가 가르친 내용과 다르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얻지는 못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겨놓으신 단 한 가지 유언인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선교에 대한 사명을 받고,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자인하고 있는 복음주의와 우리 한국교회는, 아직도 27억이나 되는 복음을 듣지 못한 세계인구를 향하여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있다. 과거나 미래 세대가 우리 세대를 복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세대에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생각할 때, 누가 설교를 해야하는가, 누가 영혼을 구해야 하는가라는 논쟁이 필요할 것인가?
우리 한국교회와는 대조적으로, 독일 감리교회는 여성이 설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안수받지 않은 교역자(전도사)도 설교 후 축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설교와 축도가 인간의 권위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와 축도의 주체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 "누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이 더 중요한 것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다 입을 다물고 있으라, 여자에겐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그 막대한 여성적 동력을 묵살해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정말 여성은 말씀 선포의 사명을 받지 않았을까? 만일 여성도 남성과 같이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전도 대상은 여성이나 아이들이어야만 할까?
여성 설교 사역의 가능성 여부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척도가 되는 경전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믿어진다. 그렇다면 성서는 여성사역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먼저 구약에서의 여성은 아내로서의 여성과, 어머니로서의 여성, 선지자로서의 여성으로 분류된다. 첫째, 아내로서의 여성은 우리가 잘 알듯 아이들과 노예와 짐승과 함께 남자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고, 일부다처제와 첩 제도 등 제도적으로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둘째,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아버지와 꼭 같이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셋째로, 선지자로서의 여성은 다른 여성과 비교하여 그 지위가 뚜렷하게 달랐다.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의 사사활동과 재판, 통치에 대해 이상하게 여긴 흔적이나 누가 시비한 흔적은 하나도 없다. 요시아 왕 때 선지자 훌다 역시 살룸의 아내였다. 그러나 왕의 대신, 시신들이 그에게 와서 묻고 왕까지도 그의 말에 복종했다.
여성 지위가 자장 열악했던 구약의 여성 사역자의 가르침과 활동 범위가 이와 같이 자유로웠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남종과 여종들의 사역이 스스로의 권위에 의한 사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심으로 인한 신적 권위에 있기 때문이다.
신적 권위는 일체 차별할 수도 없고 억제할 수도 없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언하고, 기르치고, 다스리고, 재판하는 일을 여인이며 아내가 행했을 때에 억압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의 선교학자 H. Kane은 1980년 남·여 선교사의 비율은 6:4였으며, 일이 더 힘들고 더 위험할수록 여성 선교사의 비율이 더 높아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성에게도 설교의 은사가 주어진다. 그리고 은사는 반드시 활동한다. 또 은사대로 행치 않는 것은 죄악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일부는 바울서신에서 나타난 말씀은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 디모데전서 2장, 에베소서 5장 등에 명시된 남성의 수장성은 성경의 문맥상 차별과 지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위해 세워주신 하나님의 질서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이기 때문에(고전 14:33) 선교적 차원에서, 교회에 덕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질서는 하나의 새로운 질서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 이래 인간의 지배 밑에서 괴로움을 당하던 여성이, 남성과 똑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밑에 복종하게 된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 11절, 갈라디아서 3장 28절, 골로새서 3:11에 명시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하나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인간은,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고, 남편과 아내, 남종과 여종의 관계도 회복된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요 동역자들이 된다. 각자의 기질에 따라서 은사는 다르나, 그것이 우열과 차별의 뜻은 아니다. 바울은 뵈뵈나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성 사역자를 천거하고 동역하기를 꺼리지 않았다(롬 16:1-4).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남녀를 우열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구제의 대상으로 보셨고, 똑같이 사랑하시고 섬기셨다(막 10:45).
그러면 현대교회의 여성 사역은 어떠한 것일까? 우리는 한편 아직 죄성을 완전히 벗지 못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로워진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여성의 위치가 세속 사회에서의 위치보다 더 열등한 현실 상황은 개선돼야 한다.
실제로 한국의 여러 교단에서 여성 사역자는 전임(full time)으로 봉사하면서도 저임금을 받고, 제도적으로 진급도, 신분 보장도, 은급 수혜도 받지 못한다. 흔히 갓 들어온 아들과 같은 후배 목사 밑에서 노련한 여전도사가 설교 시간 한 번 얻지 못하고 온종일 심방만 하며 수고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여성 사역자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많은 인력이 손실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여신도들은 60-70%가 되는데 여성 목회자는-배출하는 교회에 한에서-겨우 2.33%에 해당한다. 이제 교회는 여성 사역자들이 은사대로 마음껏 활약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문을 활짝 열어주어야 한다. 남종과 여종은 피차 섬기는 지도자(servant leader)가 되고, 특히 한국교회에 팽배한 지배의식은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교학적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전도자는 상황을 무시하고 일할 수는 없다. 남성 우위였던 고린도 교회의 터와, 여성 우위인 필리핀 교회의 터는 다르다. 일터에 따라서 여성의 사역 형태도 달라진다. 바울이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하여 그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고전 9:22)"이라고 한 바와 같다. 선교사적 입장에서 교회는 현지 상황에 적응하고, 그 상황을 딛고 일어서는 겸손하고 확신있는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천국에는 성차별이 없다. 아무 억압도 없다. 그러나 이 땅에는 많은 억압과 고난과 순교가 있다. 한 가지 경고는 이것이다. 교회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지나친 종속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탈취하는 것이며, 전도사역이 질식된다. 또 여자가 지나친 해방운동으로 충돌을 야기한다면 그것도 선교 목적에서 벗어난 자기해방 운동으로 격하될 것이다.
1989년 4월 필자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복음주의 여성대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대회의 제목은 "하나님의 여성이 되자"였고, 대표는 인도 목사님의 사모님인 줄리엣 토마스 여사였다. 수즙음과 억압과 눈물로 지내왔던 대부분의 아시아 여성들이 받은 은사와 소명감에 대한 갈등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며, 신앙의 자유와 복음전달의 자유를 희망하고 있었다.
인도 여성들의 토막극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나이 어린 신부가 당하는 학대와 딸을 낳고 쫓겨나는 장면이었다. 힌두교적인 전통 속에서 최근까지 인도 여성은 모진 인권유린과 슬픔을 당해왔다. 그런데 인도 여성들이 짓밟히는 이유는 정조를 봉납하는 힌두교의 사원 창부제도 때문이라고 한다. 과거 인도는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창부제도를 승인해 주고 있었다. 그 창기들은 부모가 사원에 주거나 팔아버린 아이들로서 8-9세가 되면 사원으로 데려간다. 이들은 '신과 결혼한다' 해서 한 승려가 남편이 되어 노래와 춤을 배워 힌두 남자들의 육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된다.
이러한 무희는 인도에서는 '헤테레'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매춘 행위는 성직자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인도 여성들은 가장 천하고 비열한 존재로 천대를 받고, 인도 남자들은 여자로 환생하게 될까 가장 꺼리고 무서워한다. 인도의 여성들은 가장 어둡고 구석진 방에 있게 하고, 밖에 나올 때는 얼굴을 가려야 한다. 이들은 경전을 읽어서도 안된다.
또 조기 혼인을 한다. 전통적으로 딸이 여섯 살 되기까지, 아버지가 그를 시집을 보내면 아버지는 천당 상좌에 가고, 딸이 열한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보내면 그 여인의 후손까지도 벌을 받는다고 믿었다. 1930년 통계에 의하면 15살 전에 결혼한 여자 아이가 850만명이며, 다섯 살 짜리 아내가 20만 명이나 된다.
1922년에 사망했던 인도의 Pandita Ramabai라는 여성은 이러한 어린이 아내와 어린이 과부제를 없애려고 전력을 다한 사람이며, 그가 섬기는 학교와 고아원에서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고 한다. 또 인도 여성의 인권회복과 구령을 위해 수고했던 한 여선교사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사원 창기로 팔려간 불쌍한 인도 여아들을 구원하려고 한 평생을 바쳤던 영국 선교사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lael)이라는 선교사 이야기이다.
납치와 습격의 위험속에서도 반세기를 사원의 창기로 팔려간 아동들을 데려다 급식과 교육에 힘쓰며 복음을 전함으로서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아동들을 수백명이나 건져냈던 것이다. 이러한 힌두 여성들의 비인간적 상황은 윌리암 캐리가 복음을 들고 찾아갔을 때부터 변혁되기 시작했다. 캐리의 공로로 1801년 아이를 갠지스강에 희생제로 바치는 습관이 법률로써 폐지됐고, 1829년에는 미망인들이 함께 화장당해야 하는 순사의 습관도 폐지됐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하나님 말씀은 우리 여성들에게 크나 큰 희망이며 위안이며 현실적인 체험이다. 또 우리들의 사명이다. 필자는 '아시아 복음주의 여성대회' 중 각 나라별 회의시간에 한국인 모임에 잠깐 들렸다가, 인도 여성들의 모임을 찾아갔다. 그들과 무엇인가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호소는 외침으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발언 내용은 현대 해방신학자들이나 여성신학자들의 자기해방에 관한 내용과는 달랐다. 오히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이 복음을 마음껏 전파할 수 있을까를 논의하며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는 시편 68편에 엤는 말씀을 굳게 붇들고 있었다.
그때 필자는 인도의 여성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우리 한국 여성들도 과거에 여러분과 비슷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여러분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여성들은 글을 읽지도 못했고 쓰지도 못했고, 축첩제도와 남존여비 사상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안방에서 숨어있고, 밖에 나오려면 긴 치마를 머리부터 내려쓰고 눈만 내놓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우리 한국여성들은 자유케 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자유를 베풀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 여성들은 지도자들이 되었고 대학 총장이나 장관도 될 수 있습니다. 또 여성들이 마음껏 전도사업에 참여하며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직도 더 나은 위치와 사회적 보장을 누리지 못하고, 교단에 따라서는 여성들이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주신 은사는 활용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감리교회와 같은 교단은 여성들이 받은 은사대로 마음껏 봉사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한국 여성들은 복음을 받자마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또 다른 여성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여선교사님들을 통해 한글과 성경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에 여성 지도자들이 태동되고, 여성 교회, 여성 병원, 여성 학교등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등 사상이 점차 실현이 되었습니다.
인도 여성 여러분들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살아서 역사하는 복음이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입니다". 서투른 대로 대강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토마스 여사가 가까이 다가와 아무말 없이 필자를 꽉 끌어안았다.
과거 중국의 축첩제도, 영아살해, 발 졸라매기, 또는 현재 말레이시아 무슬림의 일부다처제와 여성 억압과 혹사, 인도 여성들이 겪은 비인간적 경험 등은 아시아 선교현장에서 쉽게 목격된다. 아시아에서 태어나 영육간에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여성들이 힌두교권이나 이슬람권에 수억 명이나 된다. 이러한 여성들에게 참 자유와 사랑의 복음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한국 여성들 아닌가?
성령께서 약한 여성들을 통해서 강하게 역사하심으로 한국교회 성장이 크게 촉진된 것과 비례해, 여성들은 많은 억압과 고통에서 자유하게 됐다. 100년 전 한국의 안방까지 찾아 들어와 준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오게 된 한국 여성들은, 아시아의 다른 여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모두가 빚진 마음으로 이 일에 사랑과 기도로 동참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기독 여성들은 세계 선교의 잠재력이다.
/이동주 소장(선교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