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사회적 책임에 해답 제시하는 존 웨슬리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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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주 칼럼]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과 선교 사역 下

▲발표하고 있는 이동주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

▲발표하고 있는 이동주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

3. 교회연합운동과 웨슬리의 교회일치관

1) 웨슬리의 교회관

웨슬리가 특히 교회일치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선교적 측면에서 였다. 감리교도들은 영국교회에서 복음을 설교할 수 있고 성례를 받을 수 있는 한, 국교를 떠나서는 안 됐다. 그들은 적어도 1개월에 2회 이상 교회에 참석해야 했고, 그들 자신의 집회 장소를 교회라고 부르지도 않고 '설교의 집'이라 했으며, 감리회의 지도자들에게는 국교의 교리들을 믿고 가르치며 복종할 것을 선언했다.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이 교회 밖으로 쫓겨나지 않는다면 교회 전체를 부흥시킨다고 믿었다. 의도적인 분리는 정당화 할 수 없었다. 다만 영혼을 구원할 기회는 거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교회의 분리를 거부한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교회가 다른 집단 형성으로 말미암아 영향력이 감소되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기회가 감소되며, 논쟁에 말려들어 스스로 종교의 정신을 잃게 되고, 형제를 더 사랑할수록 덜 사랑받으며, 목적에 상반된 행동을 해야 했다. 이것이 설교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교회 분리는 형제 사랑을 깨뜨릴 뿐 아니라 많은 억측을 자아내고, 피차에 지나치게 비판하며 외적으로도 비종교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고 선교의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었다.

1747년 제4회 연회록에, 감리회원들은 그들의 교회관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반역이나 살인을 할지언정 분열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산 몸으로부터 절대로 갈라지지 않는다. ...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영국교회에 머물러 있기를 희망한다. ... 우리는 언제나 교회의 치리자나 그 규칙을 가능한 한 순종하되 다만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합치되는 경우에 한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도 웨슬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면 피차간에 차이점보다는 동의점이 더 많을 것이기에, 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서로의 차이점을 제처놓고 마귀의 역사를 소멸하고 서로 도와 모든 사람을 어둠의 세력에서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일에 합심하자"고 제안했다.

비록 설교자가 표현에 일관성과 정확성이 없고 과오가 있다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그를 학대하지는 말 것과, 그들의 의견이 자기의 것과 일치하건 그렇지 않건 형제들로부터 분리하려는 생각도 하지 말 것을 권했다. 또 자기가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떠나버리는 편벽을 경계시켰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교회의 일치를 호소한 일은, 오늘날 세계 교회를 위한 요청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의 교회연합운동은 제도적 일치보다는 선교적 일치였다.

그런데 웨슬리는 또한 선교를 위해 제도적인 분리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영국교회에서 감리교인들을 배제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평신도들을 설교자로 안수해야 했고, 속회와 연회를 조직하며, 미국 선교를 위하여 성례 집행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평신도가 설교는 하되 성례는 집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수받은 성직자가 있어야 했다. 미국은 또한 영국교회 성직자로부터 성찬받기를 거부하고 영국교회 성직자에게서 성찬을 받아야 한다는 웨슬리로부터 독립하여(1785년), 감리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영국교회의 사제였던 감리회 사역자 토마스 콕(Thomas Coke)을 감리사로 안수하여 1784년 미국에 보냄으로서 미국에서 성례를 집행하고, 미국에도 집사, 장로, 감리사 및 총리사가 임직할 수 있도록 했다. 웨슬리는 그 후 계속 18명에게 안수하였다.

세계 선교와 복음화를 위한 웨슬리의 이러한 처사에, 선교적 일치보다 제도적 일치를 더 중요시한 동생 찰스(Charles)는 "안수례가 영국교회와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형 존(John)은 그가 교회를 분리한 것이 아니라 난폭하게 추방당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교회의 분리를 선교를 저해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일치할 수 있는 제도적 일치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제도와 선교가 다 중요하지만, 선교를 위해 제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것이 찰스와 그의 견해 차이였다. 오늘날 한국 감리회는 통합이 잘 되어 있으나, 선교 사역에는 투철하지 못하다.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우선적 관심이 오늘날 웨슬리의 후예(後裔)들은 각성해야 한다.

2)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초대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에큐메니칼 운동과는 성격이 다르다. 초대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단을 경계하고 올바른 신앙을 보존하려는 고백 공동체로 형성된 것이었고, 20세기 초기(1910)만 해도 세계 선교를 위해 신앙적 일치를 도모했던 연합운동(세계선교대회)이었다.

그러나 현대 20세기 후반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초기의 순수한 목적에서 멀리 떠나, '인류 연합'이라는 비고백적이며 세속적 목적을 갖고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형성하려 한다.

먼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경적 개념을 살펴본다. οἰκουμένη란 눅 4:5f에서 '천하만국(τάς βασιλείας τής οἰκουμένης)', 즉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말하고, 이를 마귀가 자기 것으로 주장한다. 누가복음 21장 26절에는 사람들이 '세상(τῇ οἰκουμένῃ)'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종말적 공포심을 가지는 것이 기록되었다. 또 마태복음 24장 14절은 천국 복음이 '온 세상(ἐν ὅλη τῇ οἰκουμένῃ)'에 전파돼야 할 것을 말하고, 사도행전 17장 6절에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천하(τήν οίκουμένην)'를 어지럽힌다는 말로 번역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의 성경적 개념은 '천국복음'을 받아야 할 '온 세상'이고,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속화 운동이 아니라 세계 복음화운동이어야 한다. 1910년 세계선교대회 후 조직된 세계선교협의회(IMC)는 1961년 뉴델리에서 개최된 제3차 WCC 총회와 합병된 이후 '세계선교와 복음전도위원회(CWME)'로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한 기관이 되었다.

같은 해에 많은 신생교회들이 WCC에 가입했고, 러시아정교회도 가입했다. 그들의 신학 역시 이때부터 더욱 세속화되고, 1966년 주창된 혁명신학을 통해 사회정의 및 샬롬공동체(왕국)를 실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연합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61년 WCC 총회에 나타난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하나는 이 총회 제3분과 회의에서 나타난 개념이다. 이 분과에서는 교회연합을 조직적 삶의 형태나 제복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부르심 받고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코이노니아'라고 하였다.

이 코이노니아는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용서하고, 함께 고난과 기쁨을 당하고, 함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고 순종하고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공동체라고 설명한다. 이 연합은 우리 작품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함과 진리 안에서 주시는 연합이라고 한다.

이러한 고전적인 엽합 개념과 일치해 제1분과에서  또 다른 하나의 '연합'개념이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 형제(Christenbruder)'와 나란히 '인간 형제(Menschenbruder)'라는 공동체 개념을 사용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죄와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인류는 우리의 형제요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계급, 피부색, 종교에 아무런 차이 없이 인간이라는 공통성으로 모든 민족과 연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을 형제관계(Bruderschaft)라고 한다.

이 같은 비기독교인들과의 엽합운동은 1968년 웁살라에서 열린 제4차 WCC 총회에서 '교회의 보편성(Katholizität)'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강조된다. 제1차 WCC 총회부터 1966년까지 총무였고, 1968년 명예회장이 된 W. A. Visser't Hooft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이제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때가 지나가고 '포스트 에큐메니칼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 바와 같이, 제1분과 회의에서 사용한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일치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인류의 일치를 뜻하게 됐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편성을 '세속적 보편성'이라고도 한다. 이 보편성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졌기 때문에, 인류의 연합은 새로운 피조물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며, 교회란 미래의 인류연합을 위한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란 '증거와 봉사'를 통해 남녀에게 참 인간성(wahres Menschsein)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한다. 웁살라 대회는 이 보편성을 '성령의 은사이며 사명이고 참여'라고 설명하며, 모든 형태의 이기주의와 분리주의(Partikularismus)를 대립케 한다고 설명한다. 제1분과는 또 종족주의, 계급주의, 경제·정치·사회적 멸시와 착취는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교회는 이에 저항하여 투쟁해야 된다고 한다.

이러한 세속적인 연합운동과 세계공동체는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WCC 총회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뤄졌다. 나이로비대회 제3분과에서는 '공동체의 추구'라는 제목으로 "우리는 타종교인들과 타문화인들과 이데오로기들과 더 큰 공동체를 추구한다"고 했다. Visser't Hooft가 말한 것처럼 이제 교회의 연합시대는 지나가고, "확장된 의미로서 에큐메니칼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총회 중앙위원회 의장이었고 인도 공산주의 활동가이며 정치투쟁가였던 M. M. Thomas는 나이로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라는 제목 아래, 첫째로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 중심적 혼합주의를 형성할 것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근거로 한 '투쟁의 영성'을 통해 구조악을 깨뜨린 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것을 주장했다. Thomas는 그리스도 중심적 혼합주의를 문화와 종교가 서로 침투하는 '거짓의 혼합주의'와 구별해 사용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통해 교리적 차이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그리스도 중심적 혼합주의'라고 설명했다.

Thomas는 혼합주의를 '그리스도와 관련된 혼합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는 이 혼합주의 공동체를 종교적 차이를 초월하고 참 인간이며 모범적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공동체라고 하면서, 창조주이며 구원주이신 하나님이 타종교인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신다고 했다.

그 근거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그리스도 안에 만물이 있다"는 말씀(골 1:17)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다"는 말씀(엡 1:10)으로, 하나님을 '이단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도 마지막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 십자가는 모든 종교인들과 불신자들과 하나의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문화와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구조악을 깨뜨림으로써 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Thomas는 '투쟁의 영성(Spiritualität des Kampfes)'에 대해 설명하며, 이 영성은 본래 육체적·물질적·사회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건강과 이성관계, 발육, 정의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또 인간 영성은 자신을 초월할 수 있고, 스스로 영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인간 영성의 원천이요 화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 그의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Thomas는 투쟁의 영성을 '인류 연합'을 위한 것이라며, 투쟁으로서 거짓된 힘, 즉 인종차별, 자본주의, 제국주의, 성차별주의의 구조로부터 인류를 해방하자고 주장했다. 나이로비총회의 주제이자 Thomas의 강연 제목인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적이건 도덕적이건 문화적이건 종교적이건, 사람을 종속시키는 모든 연합을 파괴하고 더 성숙한 연합을 위해 남녀를 해방하며, 이 연합이 다시 종속적이 되면 또 다시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Thomas의 말은 구조악을 파괴하고자 하는 영원한 계급투쟁을 반영하여 자유와 연합이라는 개념을 풀이한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연합' 개념은 교회 세속화를 위한 개념이고, 복음과 신앙고백의 토대와 세계선교를 위한 목적을 멀리 떠나버린 비고백적 개념이 되었다. 이렇게 연합한 교회는 세속화로 인해 거룩성을 상실하고, '만물 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렘 17:9)에 굴복하게 된 것이다.

3) 복음주의적 교회연합 운동

위와 같이 에큐메니칼 운동이 세계 선교를 위한 교회연합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 연합을 위한 세속주의적 연합을 추구하는 반면, 복음주의는 과거 J. 웨슬리와 같이 세계선교를 위한 목표로 교회연합운동을 추구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의 로쟌언약 제7항에 진술된 바와 같다.

"교회가 진리 안에서 보기에도 참으로 분명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우리는 확인한다. 전도는 또한 우리를 하나가 되도록 부른다. 이는 우리의 불일치가 우리가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 손상시키듯이 우리의 하나됨은 우리의 증거를 더욱 힘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직적 일치는 여러 형태가  있으나 그것이 반듯이 전도를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성서적 신앙을 소유한 우리는 교제와 사역과 전도에 있어 긴밀하게 일치 단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증거가 때로는 사악한 개인주의와 불필요한 중복으로 인하여 누를 입을 경우가 많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진리와 예배와 거룩함과 선교에 있어서 보다 깊은 일치를 추구할 것을 약속한다. 우리는 교회의 선교사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전략적 계획을 위하여, 상호 격려를 위하여, 그리고 자원과 경험을 서로 나누기 위하여 지역적이며 기능적인 협력을 개발시킬 것을 촉구한다(요 13:35, 17:21, 23, 엡 4:3,4, 빌 1:27, 요 17:11-23)."

위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을 고찰한 바와 같이 교회 연합과 인류 연합은 다 중요한 것이다. 또 기독교인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한 자책을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확장된 의미로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인류연합 운동이 교회연합운동을 대치하거나, 세계 선교 대신 교회 세속화를 추구하는 것은 복음을 반역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성서적 고백 위에 세워진 거룩한 공동체여야 하며, 교회는 인간의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으로 말마암은 것이다. 문화혼합주의나 종교다원주의 공동체는 물론 아니다.

성경적 세계 선교란 정치·경제·사회적인 평화(Shalom) 운동이거나 억눌린 자의 자기해방운동이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의식화 운동이 아니다. 선교란 아직 소유하지 못한 진리를 공동으로 추구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복음을 나누는 것이다. 복음을 나누기 위해 전하고, 증거하고, 대화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연합운동은 세계 선교를 위해 시급하고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계획, 무질서, 낭비, 반복, 자기자랑, 분열을 제거할 수 있다. 인류연합은 필요한 것이지만 세계 선교를 위한 교회연합운동과 바꿀 수 없고 혼돈할 수 없는 것이다. 존 웨슬리가 교회일치 문제로 동생과 다투었던 이유가 바로 이 세계 선교를 위한 사명 때문이었다.

결어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신학은 고등교리적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신학이라기보다, 복음을 효과 있게 선포하여 가능한 한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선교학이라 볼 수 있다. 영국 사회와 교회의 타락에 반사 작용으로 발생한 청교도적 엄격한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신앙생활은, 대학 시절 그의 봉사활동으로 말미암아 철저하고 전폭적 헌신적인 경건과 규칙쟁이라는 조롱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터 위에서 얻은 경건주의적 중생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영국에 큰 각성운동과 사회의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그의 성경적 신앙과 중생에 의한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그의 조직력과 성결운동은 감리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기반 위에 견고히 서게 하였다. 합리주의와 알미니안주의적 배경으로 그는 신비주의와 합리주의를 둘다 배격했고, 오히려 선행 실천력을 강화하여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으며, 피동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만민을 구원하려는 열심을 품고 선교와 복음화 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그의 선교는 오늘날 해결하지 못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질문에 해답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참 신앙인 되고 거룩한 신자가 되면, 영혼도 사회도 함께 새로워진다는 것을....

이동주 소장(선교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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