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연구(6)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 5:12)
길갈에서 있었던 중요한 또 다른 사건은 만나가 중단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치면서 40년 광야생활 내내 아침마다 공급되었던 만나가 그쳤다. 만나의 중단은 그동안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축복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나의 중단에는 그 이상의 더 큰 의미가 숨어 있다.
만나가 처음 내린 시기는 출애굽한 후 한 달이 되던 때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너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광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사막 한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은 큰 위기를 만났다. 그것은 애굽에서 준비해온 모든 양식이 떨어진 것이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터뜨렸다. 애굽에서는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잘 먹고 잘 지냈었는데, 이제는 광야 사막에 나와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출 16:1-3).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 공급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광야 40년 생활 동안 만나의 공급은 중단 없이 지속되었다.
하나님의 만나 공급에는 몇 가지 중요한 신앙적 요소가 들어 있다.
첫째는 만나의 공급이 이루어진 곳이 광야라는 점이다. 광야는 인간의 능력이 전혀 발휘될 수 없는 장소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곳이 광야이다. 광야에서 인간의 능력은 극소화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둘째는 만나의 공급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절대 한계점이 되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절대 긍정이 되신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만나의 공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셋째는 만나는 단순히 삶을 유지시켜주는 양식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가나안을 향하여 가기 위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만나의 공급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며 보장이다. 예수께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다고 약속하셨다(마 6:33). 이스라엘이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곧 한 사람이 하루에 한 오멜만의 만나를 거둘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아야 했다(출 16:16, 19). 반면에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 몫까지 합쳐서 두 배의 만나를 거두어 들였다. 그것은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출 16:23).
그러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길갈에 도착했을 때 왜 만나가 그친 것일까? 이스라엘은 더 이상 광야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환경이 바뀌었다. 그들은 더 이상 광야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새로운 가능성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섰다.
만나가 그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중단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일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 주신 하나님의 인격적 배려였다. 그런 점에서 만나의 중단은 오히려 더 큰 축복을 향하여 나아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축복의 근본적 의미는 '생산성'의 회복이다. 곧 축복은 만들어진 결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특히 우리들의 삶과 직결된 땅과 관련된 축복은 더욱 그런 점이 부각되어 있다. 신명기에서는 토지의 소산이 많아지는 축복을 '여호와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신 28:11-12).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과 열심히 일하는 이스라엘이 함께 손을 마주 잡을 때 축복된 결실을 거둔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만을 받아먹는 유아적 존재가 아니다. 이제는 스스로 일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축복의 결실을 창출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길갈에서 만나가 그친 근본적 이유이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