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의 선물 (16)] 평등과 선물
지금까지 키에르케고어의 '선물' 사상을 소개하기 위해 사도 야고보의 목소리를 빌어 전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 적용하면서 '선물'에 대해 소개하고 풀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금까지 이어졌던 긴 이야기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의 삶은 선물이 되어야 하고, 사랑 없는 삶은 선물일 수 없다"는 겁니다.
언제나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인생이 선물이라고 고백하기는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물질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인생은 선물'이라 고백하는 건, 너무 잔인해 보입니다.
특히 신앙인은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삶의 고통을 '팔자 타령' 치부하면 되고, 일종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끝입니다. 굉장히 쉽습니다. "이건 내 팔자야"라고 하면 끝!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허구한 날 듣는 소리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라고 듣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또한 그렇게 믿고 "아멘!" 합니다.
자, 보십시오. 아무리 신 존재 증명을 하고 창조과학회에 가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입증해도, 당신의 삶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만성 두통에 시달리고, 당뇨에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지요. 하나님께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지 어언 10년도 더 됩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누군가 교회에 와서 간증합니다. 예수 믿고 사업이 잘 됐다는 둥, 아이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둥, 암이 완쾌되었다는 둥, 온갖 신앙의 기적들은 다 듣습니다. 그러나 내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여러분들은 버림받은 존재처럼 있는 겁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모두들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그분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는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버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사랑이신지 의심은 더욱 커지지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키에르케고어의 '선물'은 바로 이런 사람을 겨냥하고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고통밖에 남지 않는 실존'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인 겁니다.
어떻게 해답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인생을 선물로 믿고 받는 자에게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겁니다. 신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거듭남의 경험입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삶의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단지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 겁니다.
아마도 우리가 고통밖에 남지 않는 삶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일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 사랑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사랑은 죽기까지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이 사랑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도대체 무슨 일로 바쁘신지, 나의 삶의 고통은 왜 해결해 주시지 않는 것인지 따지고 있는 자입니까?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사랑의 실천이고 이 실천은 '선물'입니다. 사랑은 거래가 아니니까요.
키에르케고어는 이쯤에서 선물의 차이에 천착합니다. 다시 말해, 선물에서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차이가 분명해진다는 것이지요. 거래의 경제는 주고받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물은 어떨까요? 주는 자는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주고, 받는 자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받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선물만큼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물에서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걸까요? 선물은 어떻게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걸까요?
이 부분을 다루기 위해, 우리는 야고보서 2장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야고보서 2장을 보게 되면, 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앞자리에 앉게 하고 가난한 자가 들어오면 발등상에 앉으라고 합니다. 그것도 교회가! 한 마디로 말해 교회가 세상의 차별을 조장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도 키에르케고어는 그 당시에 덴마크 국교회의 타락을 지켜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왜 교회가 지탄받고 있는 걸까요? 왜 교인들은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걸까요? 교회나 세상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아니, 교회가 더 차별합니다.
십일조 많이 내는 사람은 대우받고 십일조 얼마 못 내는 가난한 교인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교회에서 대우받고 살고, 사회적으로 약자들은 교회에서 숨어서 지내야 합니다.
아,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따지는 분이 계시군요. 좋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건강하다 칩시다. 그런 당신께 말씀드립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역차별이 발생합니다.
정말로 간음한 여인을 불러왔더니 죄 용서함을 받고, 마음으로 간음한 사람을 불러왔더니 간음한 자라고 정죄합니다. 정말로 살인한 사람을 불러왔더니 사랑으로 감싸주고,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한 것뿐인데 살인자라고 정죄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종은 주인이 되고, 주인은 종이 됩니다. 이런 현상이 일종의 역차별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차이와 차별의 문제가 교회에서 제거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세상과 똑같이 사람을 차별하든가, 아니면 역차별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평등을 실현하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선물을 다시 불러옵시다. 문제는 선물에서는 이런 차이와 차별이 더욱 강화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는 일방적으로 주고, 받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다?
과연 선물에서 차이를 제거하고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걸까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