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3일 서울 연세대학교 공학관에서 텀블러 폭탄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교 교수 연구실에서 사제 폭탄이 터져 교수가 부상을 입은 것이다.
교수는 연구실 출입문 앞에 놓여 있던 종이가방을 연구실로 갖고 들어갔다. 가방 안에 있던 상자를 여는 순간, 갑자기 폭발하면서 불이 붙었다. 그 불로 인해 교수는 화상을 입었다. 대중 테러가 아니고,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았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깜짝 놀라게 한 불이다.
범인이 사용한 폭탄은 IS가 사용하는 '못폭탄'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 수준의 폭탄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폭탄 안쪽에 나사못을 넣은 것으로 보아 상대를 살상하거나 치명상을 입힐 의도가 담겨 있었다. 폭탄으로 인한 불의 위험보다 범행의 숨겨진 동기가 더 무섭고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이렇게 저렇게 모방하며 사는 존재이다. 어린 시절 롤 모델을 정하고 그렇게 성장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을 게다.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우는 장군이 될 거야. 테레사처럼 훌륭한 수녀가 될거야.' 어떤 사람을 롤 모델로 설정하고, 그 사람을 닮아가고 모방하려고 애썼다. 그러한 모방을 통해 한 사람의 인격과 인생은 더 아름다워진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도를 보이시면서 '너희도 나처럼 행하라'고 당부하셨다.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빼닮은 사람 중의 하나인 바울도 "내가 예수님을 본 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 받으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부정적인 모방을 하는 경우도 많다. 청소년들은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위시한 영상 매체를 통해 모방범죄를 많이 저지른다. 모방하려면 좋은 쪽으로 모방해야 하는데, 인간은 부정적인 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크다. 그게 문제다. 의지적인 선택의 버턴을 잘 눌러야 한다. 한 순간 잘못 누른 선택 버턴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과 사회에 아픈 충격파를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텀블러 폭탄 사건을 저지른 범인은 대학원생이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했을까? 평소에 교수님의 심한 질책에 대한 반감으로 저지른 범죄로 판명되었다. 지난 5월 말 논문 작성 과정에서 교수에게 크게 꾸중을 들었는데,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앙심을 품고 범행을 계획한 게다.
세상을 살면서 좋은 소리만 듣고 살 수는 없다. 욕도 먹고, 애매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억울한 말을 듣기도 한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로 인해 몇날며칠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도 그게 세상살이 아니던가. 그런 말로 복수와 앙갚음의 칼을 간다면 세상은 요지경이 된다.
그러려니 하면 안 될까?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넘겨 버리면 안 될까? 친한 친구에게 속상한 말 한 번 내뱉고 끝내면 안 될까? 아니 더 지혜로우려면,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더 낫지 않을까?
다행히 교수는 제자를 선처해 달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교수이니 어쩌겠는가? 제자의 허물을 감쌀 수밖에. 괘씸하다 할지라도 스승의 자리에 있으니 참을 줄 알아야지. 아니 어쩌면 학생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다시 한 번 되뇌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면 자기 성장의 발판도 될 수 있겠지.
여하튼 교수 연구실에 일어난 폭탄으로 인한 불은 경미한 사고로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앞으로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불이다. 더구나 사제지간의 사건이니 더더욱 그렇다.
더 무시무시한 불 이야기도 있다. 지난 6월 14일 새벽, 사람들이 잠든 시간에 영국 런던의 '그렌펠 타워' 아파트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24층 아파트가 4시간 만에 불타버렸다. 2층에서 시작된 불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속도로 꼭대기 층까지 번져 갈 수 있었는지. 마치 성냥갑이 타들어가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소방차 40대와 소방관 200명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화재는 좀처럼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검은 연기는 몇 ㎞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아직까지 정확한 집계가 어렵지만, 수십명의 사망자와 엄청난 부상자를 속출한 화재이다. 그런데 그 출발을 생각하면 더 기가 막힌다. 4층 어느 집 주방에서 난 작은 불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불이 24층 건물 전체를 집어삼키는 불기둥으로 변한 게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게다.
이웃을 잘 만나야 된다더니 실감나는 일이다. 이웃집에서 난 작은 불이 수많은 이웃들을 불바다로 만든 게다. 그러니 누가 '이건 사고하고 작은 일이니'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큰일들이 아주 사소한 데서, 작은 데서 출발하니 말이다.
불타는 건물을 바라보노라면 소돔과 고모라 성이 생각난다. 부패하고 타락한 한 도시에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일어난 게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반역했다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불에 의해 250명이 불사름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민 16:35).
런던 아파트 화재에 타오르던 불은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케 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화려한 삶을 살았던 부자, 그는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날마다 잔치로 즐겼다. 그러나 그에게도 죽음이 다가왔다. 죄 아래 있는 인생에게는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
그런데 중요한 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존재한다. 그 세계는 끝나지 않는 영원한 세계였다. 그렇게 결정되는 세계는 엄청나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옥은 엄청난 고통의 세계이니까.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이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으면 나사로가 이렇게 고백했을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 16:24) 성경은 지옥을 불타오르는 세계로 묘사한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이를 갈리라(마 13:49-50)." 런던 화재의 불은 무서웠다. 그러나 지옥불은 훨씬 더 무섭다. 앞으로 다가올 현실과 실재이겠지만.
런던 아파트 화재 때 입주민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좀처럼 살 길을 찾지 못했다. 9-10층에서 한 여성은 창문을 열더니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아기를 밖으로 던졌다. 그러자 한 남성이 달려가 가까스로 아이를 받아내기도 했다. 드라마 같은 탈출이요, 구조이다.
불타오르는 고통스러운 지옥세계의 탈출과 구조는 어떻게 가능할까? 죽음 이후에는 이미 늦었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방법이 없다. 부자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하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가 걱정되었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세계에 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서 보내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증언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은 건널 수 없는 불통의 세계이니까.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에서 결정된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천국을 갈 수 있다. 그 외에는 어떤 자라도 모두 지옥행이다. 런던 화재 현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그 세계는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지옥불의 고통에서 허덕이게 만들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건져내어야 한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이다. 오늘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복 된 소식!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