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연구(10)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이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이었던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은 이스라엘에게 너무도 큰 감격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 앞에서는 어떠한 것도 맞수가 될 수 없다는 확신을 얻은 전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의 기쁨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간의 범죄였다. 그의 잘못은 자신과 함께 가족 전체의 비참한 죽음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여리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아이성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도바울이 강조하였던 것처럼,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계와 교훈들이다(고전 10:11). 그렇다면 아간이 저지른 범죄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전해주는 것일까?
아간이 범한 죄는 여리고성을 점령하면서 하나님께 바쳐야할 전리품 가운데 세 가지를 감추어 자신의 소유로 삼은 것이다. 그것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그리고 오십 세겔의 금덩이 하나였다. 아간 자신이 고백한 내용에 따르면, 그는 그것들을 보는 순간 탐심이 생기게 되어 결국은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되었다(수 7:21).
여기에서 그의 잘못은 세 단계를 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간이 죄를 짓게 된 첫 번째 단계는 물건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일 수 있었다. 어쩌면 여호와께 바치기 전에 그 물건들을 잠시 아간이 보관하는 책임을 맡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눈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마음속의 탐심으로 연결되는 두 번째 단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탐심에 사로잡힌 아간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실행 단계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한 세 단계의 범죄 과정은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죄를 짓는 과정이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었다(창 3:6; 삼하 11:2-4).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유혹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다.
아간이 범한 죄의 본질은 탐심이었다. 그가 금과 은을 보는 순간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평생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게 해 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일종의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것이다. 또한 시날 산 고급 외투를 보면서 그는 그것이 자신의 외양을 멋있게 꾸며줄 것이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추구하는 잘못된 세속적 유혹일 뿐이다. 참된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의 보장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것처럼,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력은 터진 웅덩이에 물을 모으려는 헛수고에 불과하다(렘 2:13).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은 자가 된 것도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세속적인 것에만 관심을 몰두했기 때문이었다(눅 12:13-21).
신약성경은 잘못된 탐심을 우상숭배에 해당된다고 규정하고 있다(엡 5:5; 골 3:5). 지나친 욕심이나 탐심은 관심을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앞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이다. 욕심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염려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바른 신앙의 삶을 의미한다(마 6:33).
아간의 일차적 잘못은 하나님의 물건을 범한 것에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결정적 잘못은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놓친 점이다.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중에 실패의 원인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범죄자가 누구인지를 색출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체 지파를 모아놓고 해당 지파와 족속과 가족을 차례대로 선별하였다. 긴 선별과정을 거친 결과 아간이 뽑히게 된 것이다. 아간이 스스로 자신이 범한 죄를 고백한 것을 그런 긴 선발 과정을 거치고 난 이후였다. 너무 늦게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자 자신의 잘못을 밝힌 것이다. 그것은 참된 회개라고 할 수가 없다.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는 막판에 몰려 자신의 잘못을 실토한 것에 불과했다.
참된 회개가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넘기는 너무도 큰 죄를 범했다. 그에 못지않게 베드로 역시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하는 무서운 죄를 범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회개를 했느냐 안했느냐에 따라 두 인물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 통곡하며 회개한 반면에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온 가족과 함께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간의 잘못은 탐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물건들을 자기의 것으로 감춘 것이지만 그것과 더불어 제 때에 바르게 회개하지 못한 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회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반전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