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재 목사 설교전해
제이어스 7월 정기예배가 22일 오후 7시 열렸다. 제이어스 정기예배는 신반포교회에서 진행되다가 지난 4월부터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서울 성락성결교회에서 정기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날 예배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성경말씀 히브리서 12장 2절을 봉독하며 시작했다.
제이어스 측은 “지난 달, 예배는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예배는 드리는 것이라 했었다. 예배는 한 분, 우리 주인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할 때 우리 마음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믿는다”며 “이 땅과 나 세상과 환경을 바라보는 낙심한 마음, 육신의 눈을 감고, 영의 눈을 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 달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 것이 십자가인줄 믿는다”고 했다.
이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경배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아직도 세상에 너무 많다. 오늘 우리가 그들을 위해 부름 받은 줄을, 먼저 복음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길 원하시는 주님을 알고, 온 땅이 주님을 경배하기까지 쉬지 않겠다”며 “우리로서는 갈 수 없는 그 길 가운데 가게 해 달라. 그리스도가 가신 십자가의 길, 많은 선진들이 갔던 그 길, 순교자의 길, 주님께서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그 길에 서길 원한다. 성령을 충만하게 하사 그 길에 서게 해 달라”고 고백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말씀은 강남지역 청소년 학원 선교 및 지역 교회 연합 운동 ‘다세연(다음세대를 섬기는 사람들의 연대)’의 김용재 목사가 마태복음 11장 28~30절을 본문으로 전했다. 김용재 목사는 본문과 함께 다음의 이야기를 전했다.
“1904년에 크리스마스 아동극으로 상연한 동화가 있습니다. ‘피터팬’입니다. 그림자를 찾으러 온 피터팬이 웬디를 만나 환상의 나라로 날아가죠. 그곳에는 6명의 아이들과 선장, 팅커벨도 있습니다. 피터팬은 평생 어른이 되지 않는 소년입니다. 197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로 삶이 바빠지니 어른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고 낭만적이고 행복만을 꿈꾸고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을 ‘피터팬 증후군’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터팬 이야기 중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림자가 창틀에 걸렸다가 그림자가 뜯어지는데, 나중에 피터팬이 그림자를 찾으러 웬디에게 가는 이 장면입니다. 어른과 어린이,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의 차이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미성숙한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못 마땅히 여기는 부분을 계속 부인하고 못 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림자와 관련된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어느 날 늘 생각해 왔던 거지만, 그림자가 못 마땅해 ‘오늘은 그림자를 내게서 뜯어내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밥을 먹고 나서 뛰기 시작합니다. ‘숨 차고 힘들면 그림자는 더 힘들겠지’, ‘그러면 그림자가 끊어지겠지’라는 마음에 죽도록 뛰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앉았습니다. 땀나고 죽을 것 같은데, 그림자를 보니 아무 힘든 기색이 없이 붙어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는 결심합니다. ‘죽을 때까지 뛰겠다’ 그러다 죽어버렸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바로 옆의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무 그늘 아래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누구인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가’ 생각해 보는 겁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내 근원이 그분 앞에 서는 날, 그림자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어쩌면 이 그림자가 어쩌면 평생 따라다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분명 존재하지만 본체인 나를 조금도 손상시킬 수 없는 것을 문득 깨닫습니다. 그림자가 남들보다 커서 끌고 다니기 힘든 사람은 없겠죠? 나무 그늘 아래에 쉰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는 겁니다. 진리를 기억하는 거예요.”
이어 김 목사는 “사람들은 나무 그늘 아래 쉬기 위해 절기를 만들었다”며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안에서 쉴 줄 아는 사람들이다. 성경에도 세가지 절기가 있다.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이 중에서 오늘은 유월절에 대해서만 나누려 한다”고 유월절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했다.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됐을 때 전 세계에 가뭄이 들었죠. 그 때 야곱의 집안에 요셉의 초청으로 이집트로 이민을 가는데, 식구들이 70여명 됐죠. 그리고 약 430년을 잘 삽니다. 남녀노소 250에서 300만명의 사람들로 늘어나는데 이주노동자들이라고, 고대 사회 바로 왕의 노예처럼 삽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좋은 인력, 하나님 보시기에는 남의 나라 밑에서 먹는 거도 먹고, 집도 얻어 살고, 옷도 있긴 한데 자유를 빼앗긴 채, 바로의 명령에 따라 노예처럼 사는 겁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신 거죠.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자유를 잃고 방향 없이 그곳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입장에서 너무 안타까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시려고 모세를 보내시죠. 모세가 안 간다고 못 간다고 못한다고 하니, 동역자고 붙여주시고 할 말도 알려주시고 해서 그렇게 모세가 갑니다. 300만 명이 쑥 나가려 합니다. 누가 제일 싫어하겠나. 바로입니다. 당장 일 시킬 사람이 없어지니 안 된다고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서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시죠. 바로가 끝까지 안 된다고 하다 10번 째 재앙으로 장자, 사람과 동물의 처음 난 것이 다 죽게 됩니다. 불순종함으로 모든 이집트 집안이 초상나게 됐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린 양을 희생시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 피를 문에다가, 틀에다가 바르는 겁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 밤 이집트에 와서 피를 안 바른 사람 집에는 들어가고, 바른 사람 집은 ‘Pass Over’. 지나가는 겁니다. 그 날을 기억하는 겁니다. 넘어간다는 뜻의 유월(逾越)입니다. 은혜로 넘어가는 겁니다. 무얼 보고 넘어가나?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겁니다. 아무 이유 없습니다. 다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희생양, 어린 양의 붉은 피를 보고 넘어가셨습니다. 살면서 죽을 것 같은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을 기억하며 그 영혼이 쉼을 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주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부터, 앞으로 태어날, 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인류가 죄와 죽음의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 죄의 짐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어릴 적 제게 하시던 말씀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제가 ‘오만 가지 잡상’과 ‘오만 가지 잡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게 사실인 거 있죠. 뇌 과학자들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 하루에 사람이 6만 6천가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96%이상이 어제 했던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단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뇌의 10%만 활용하면 천재라고 그랬죠. 무의식적으로 했던 생각을 똑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 중 96%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염려라고 합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뇌 과학자들의 얘깁니다. 할 수 없는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 통틀어 죄책감이라 합니다. 죄의 그늘에 앉아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쉰다는 것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벗어나는가? 지금 여기 이 시간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 앞에 엎드림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자리에 머물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죽으면 천국 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생명이 다하면 죽은 것이라 하죠. 물리적으로 죽지 않는 영생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성경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간적 생각과 의지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거죠. 예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내가 옳다 여기는 것, 내가 원하는 계획들, 하나님을 원해서 한다는 것이든 사람을 돕는 것이든,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든, 하나님 깜빡 잊고 세운 바벨탑이든 무너뜨리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 이게 죽는 겁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굴레, 사람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끝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어린 양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이후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넘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우리가 감당할 죽음의 공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시고 넘으셨습니다. 우린 우리 자신을 잘 압니다. 다른 이들이 날 욕하면 기분 나쁘지만, 내가 나를 비난할 때는 거부할 수 없죠. 고스란히 영적 데미지를 받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하십니다. 내 아들의 생명을 버릴 만큼. 이것은 온 우주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림자와 연약하고 완악한, 부족한 부분이 있죠. 신앙 안에 살다가도 넘어지는 부분이 있죠.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무 아래 쉰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김 목사는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라며 모인 모든 이들과 함께 찬송가 ‘십자가 그늘아래’를 부르며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