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대신 대대장 개 밥그릇 닦다 2년."
몸종 취급당하는 공관兵의 눈물어린 호소이다. "이런 게 국방의 의무인가요?" 아니다. 국방의 의무는 그런 게 아니다. 나라의 운명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신성한 부름 앞에 서서 온 국민들의 안보를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다.
아들과 딸들을 군대에 보내는 부모는 그런 심정으로 보낸다. 아무리 편한 보직으로 보내고 싶은 게 부모 된 자의 심정이고, 군대로 끌려가는 본인들의 심정일지라도, 한 나라의 군인으로 부름받은 그대들은 귀하고 귀하다.
국방의 책임을 지고 나라의 앞날을 책임지는 군인들이 있기에, 후방에서 국민들은 안심하고 일상을 누릴 수 있다. 목숨을 걸고 안보를 책임져 주기에 안심하고 산업 전선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며, 가정에서 가사에 몰입한다.
북한이 으르렁거리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이 호시탐탐 자국의 이권을 챙기느라 눈알을 부라리고 있는데, 국방이 허술하면 국민들의 생활이 불안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군대에서 지휘관들의 역할과 책임은 너무나 중차대하다. 그들의 책임과 의무가 중차대한 만큼, 그들에게 많은 혜택도 누리게 한다. 그 중 하나가 그들의 안전한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해 공관병을 붙여주는 일이다.
현재 군 지휘관 관사 또는 공관에는 근무병, 조리병, 운전 부사관 등 2-3명이 근무한다. 대장급 공관에는 4명 가량이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영내에 머물러야 하는 지휘관들이 원활히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그런데 최근 그 이면의 어두운 세계가 속속 드러나면서, 사회적인 파장이 일고 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지휘관이 병사를 하인 부리듯 하는 악습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고질병이다. 그런데 더 힘든 건 부인과 가족들의 갑질이다. 그들의 '슈퍼 갑질'이 드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세상에는 거짓이 진실처럼 판을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흑이 백으로 둔갑해 돌아다니고, 어둠이 빛처럼 활개를 치기도 한다. 손을 들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하는 법정에서조차, 위증과 거짓 증언이 허다하다.
그러니 세상에서 들려지는 것을 다 믿을 순 없다. 과장도 될 수 있고, 꾸며질 수도 있다. 진실 유무는 아직 더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언론에 노출된 사실들을 모아보면 너무 서글프기 그지없다.
언론에 드러난 실체만 해도 기가 막힌 일들이 많다. 공관병에게 손톱을 줍게 하고, 속옷 빨래까지 시킨단다. 조리병이 음식을 마음에 들지 않게 조리하면 모욕적인 발언도 일삼는단다. "너희 엄마가 너 휴가 나오면 이렇게 해 주느냐?"
어느 날 공관에서 떡국을 끓이던 중이었다. 장교 부인은 "떡이 서로 붙지 않게 하라"고 공관병을 질책했다. 그 바람에 공관병은 끓는 국에 손을 넣고 맨손으로 떡을 떼기도 했단다.
심지어 다육식물이 뭐길래, 그것이 시들자 공관병에게 폭언도 했다고 한다. "너는 물 먹지 마라"고. 공관병에게 호출용 전자 팔찌를 채우기도 했단다. 부인이 공관 2층에서 호출 벨을 누르면 즉각 뛰어와야 한다.
그런데 공관병이 늦게 올라오거나 전자 팔찌 충전이 덜 돼 울리지 않으면, 악담을 퍼붓는다고 한다. "느려터진 굼벵이", "한 번만 더 늦으면 영창에 보내겠다." 심지어 2층으로 뛰어서 올라오지 않았다고 "다시 내려갔다가 뛰어서 올라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단다. 호출벨을 공관병에게 집어 던지기도 했단다.
한 공관병은 업무와 사적 지시, 부인의 괴롭힘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급기야 자살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또 다른 공관병은 부인의 질책을 못 견디고 공관 밖으로 잠시 뛰쳐나갔다. 남편인 대장은 공관병을 호되게 질책했다. "내 부인은 여단장(준장)급인데 네가 예의를 갖춰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리고 최전방 부대로 보내져 1주일간 경계근무까지 섰다고 한다. 부창부수인가?
군대 조직에서 지휘관과 가족들이 병사들을 개인 비서처럼 부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러다 이번엔 그 불편한 진실이 세상에 폭로되면서, 별 네 개가 떨어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처참한 비극인가? 한 순간에 쌓아올린 명예가 졸지에 추락했다. 누리고 있던 모든 특권들이 일순간 사려졌다. 여기까지 올라가는 데 얼마나 많은 애를 썼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그런데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어땠는가? 온 세상 모든 군왕들의 지휘관이 되신 예수님은 달랐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기는 자로 오셨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희생제물로 내어주셨다. 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아무리 천하게 보이는 사람에게도 갑질하지 않았다. 아니 본인이 갑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스승이시지만, 제자들의 먼지 묻고 더러운 발을 씻어주셨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를 들고 친히 물을 떠오셨다.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닦아주기 시작하셨다. 추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모든 죄를 씻어주기까지 하셨다.
주인은 주인 행세를 하고 싶어한다. 왕은 군림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을 호령하고 이것저것 명령하기를 원한다. 시켜도 될 일이 있지만, 시키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 해도 될 일이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그런데 그런 걸 가리지 않는다. 갖고 있는 권력과 힘을 이용해 상대방을 굴복시킨다. 거기서 쾌감을 얻는다. 굴복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쭐해한다.
소위 이게 갑질이다. 세상에는 힘을 가진 자는 힘이 없는 자를, 권력을 장악한 자는 약자를 주무르려고 한다. 작은 대가를 지불해 주면서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한다. 자신의 말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려 한다.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을 그렇게 부리려고 한다. 건물주는 세입자들을 억울하게 만든다. 상사들은 하급자들을 종처럼 부려먹으려 한다.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난폭하게 대하기도 한다.
심지어 요즘은 많은 갑들이 '을질' 하는 사람들을 지탄하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 중에는 '병질'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여기저기 병든 우리의 민낯이 드러나서 부끄럽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그렇지 않음이여'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집권자들은 그럴지라도, 제자의 길을 걷길 원하는 너희들만이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땠는가? 서로 '누가 크냐?'는 문제를 두고 얼굴 붉히면서 심하게 다투었다. 힘이 좋기 때문이다. 권력이 좋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 안에 휘두르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3년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 소용없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인데?' 그게 무슨 효과가 있었던가? 너무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나도 스스로를 돌아본다. 담임목사로서 부교역자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동역자라고 하면서.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섬겨야 할 대상인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동역자로 세워준 직분자들에게 갑질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누구를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기보다 나 스스로를 점검해 본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과 모습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