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2-1] 자신을 시험하라!
키에르케고어의 ‘선물’ 개념에 대해 26차례에 걸쳐 연재해 주신 이창우 목사님(<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온빛교회)이 그의 또 다른 저서 <자기 시험을 위하여>를 소개해 주십니다. 이번 글에서는 서론 격으로 키에르케고어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풀어 주셨습니다. -편집자 주
키에르케고어의 작품은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후기 작품의 특징은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날로 변질돼 가는 기독교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자기 시험을 위하여(For Self-Examination)>가 있습니다.
이 작품과 함께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판단하라!>, <그리스도교 훈련>,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도대체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이 작품들을 읽어 보시면 됩니다. 이 작품들은 키에르케고어가 기독교를 변호했던 불후의 명작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대표적인 사상서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얼마 전 <스스로 판단하라!>는 도서출판 샘솟는기쁨에서 출간됐고, <자기 시험을 위하여>는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두 저서는 가명의 저자 안티 클리마쿠스가 쓴 책인 <죽음에 이르는 병>과 <그리스도교 훈련>이 1849년과 1850년 각각 출판된 후, 같은 연도인 1851년에 남긴 작품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판단하라!>는 기독교 비판이 많이 있었기에 그 당시에 출판하지는 못하고 유고집으로 1876년에 출판되었지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이 작품은 기독교를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끌어올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는 한 마디로 무엇인가? '본받음'입니다. 바로 이 본받음이 <자기 시험을 위하여>의 핵심 내용이지요. 본받음이란 하나의 행위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같은 길을 걷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키에르케고어만큼 야고보서를 사랑하고 변호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루터가 믿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 '믿음'을 강조했다면, 키에르케고어는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판했던 야고보서를 '행위'를 간직한 믿음의 서신서로 복원한 인물일 것입니다. <자기 시험을 위하여> 1부는 야고보서 1장 23-24절의 변증적 성격이 강하지요. 이뿐입니까? 제가 그동안 소개했던 '선물' 역시 야고보서 1장 17절에 대한 변증이지요. 아마 이쯤 되면 그가 얼마나 야고보서를 좋아했는지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야고보서를 좋아하고 강조한 걸까요?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친 듯이 야고보서를 한 구절, 한 구절 '변증'한 것일까요? 그것은 기독교의 엄청난 타락을, 엄청난 변질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중세 시대의 끔찍한 기독교의 변질보다 더 큰 변질이 개신교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시험을 위하여> 1부에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논합니다. 중세 기독교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타락입니까? 모든 것은 행위가 돼 있었지요. 잘못된 행위 말입니다. 중세 수도원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 스스로를 '자학'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를 연출하기도 했지요. 그들은 조금이라도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행위가 되어 있었지요.
이런 타락을 목격한 사람이 루터였고,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믿음을 위해, 믿음을 굳게 세웠지요.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말했지요. 행위를 강조했으니까요.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중세 시대보다 더 끔찍한 타락이 생겼습니다. 곧, 믿음에서 행위를 제거한 겁니다. 행위는 위험한 것이니까요. 바로 여기에서 '싸구려 복음'이 탄생합니다.
"믿기만 하면 돼. 행위는 위험한 거야. 그건 너무 쉽게 공로가 되거든. 그런데 알잖아?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행위는 위험한 거야. 아예 행위를 버리면 공로를 주장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없지."
키에르케고어가 보았을 때, 이런 "싸구려 복음"은 중세보다 더 위험한 복음의 변질이었지요. 그는 행위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야고보서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구석에 먼지 묻은 채로 놓여 있는 서신서를 꺼내서, 먼지 툭툭 털고 한 구절, 한 구절 변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렇게 설명하면 감을 잡으시겠습니까?
행위를 제거한 믿음의 복음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아기를 목욕시키고 목욕물과 함께 아기를 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기독교에서 어떻게 행위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행위가 무관심의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기독교에 행위를 제대로 세운다면, 그것은 "본받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시험을 위하여> 1부는 이런 식으로 야고보서에 대한 변증적 성격을 지닙니다. 2부는 '좁은 길', 3부는 '성령'이 주제입니다. 총 3부로 구성돼 있고, 책 제목에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스스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 자인지 시험해 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한국 개신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능력받기 위해 기도원에 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 기도원에 가는 많은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그분을 닮기 위해 기도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정말로 그분의 길을 가기 위해 매일 애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많이 있나요? 오늘날도 동일하게 그분을 본받는 삶은 여전히 외면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자기 시험을 위하여>를 소개하기 위한 첫 삽을 떴습니다. 먼저 개론으로 책 전반의 내용과 후기 작품과의 관계를 살펴본 후, 각론으로 각 장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