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칼럼] 내 인생의 연주자
아무리 고가의 좋은 악기라도, 나같이 형편없는 연주자를 만나면 시끄러운 소리만 날 뿐이다. 그러나 다소 보잘 것 없는 악기라도, 명연주자의 손에 들어가면 아름다운 선율을 내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선물해 줄 수 있다. 연주자가 중요하다.
어느 날 영국의 템스강변에서 한 거지 노인이 낡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지 노인의 연주에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돈벌이가 될 리 없다. 낙심되는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낯선 외국인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를 측은히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저에게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이올린을 좀 다룰 줄 아는데, 제가 대신 몇 곡만 연주해 드려도 될까요?"
거지 노인은 자신의 바이올린을 건네주었다. 외국인이 활을 당기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감탄하며 연주를 듣던 사람들은 거지 노인의 모자에 돈을 던져 넣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돈이 쌓였다.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 사람은 바로 파가니니다!" 파가니니는 이태리가 낳은 천재적인 바이올린 명연주자이다. 그는 런던에 연주차 왔다가 잠시 산책하던 길이었다.
낡은 바이올린이다. 동일한 바이올린이다. 그런데 거지 노인의 손에 잡혔을 때와 파가니니의 손에 들어갔을 때의 소리가 전혀 딴판이다. 연주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소리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양'은 연약한 존재이다. 공격력이 없고, 방어력도 없다. 그러니 철저하게 목자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양'은 뛰어난 청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목자의 소리를 잘 듣는다. 휘파람을 불어도 정확하게 알아듣는다. 양은 목자의 음성만 잘 들으면 된다. 그때 선한 목자는 양들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한다(2절).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내 인생을 '내'가 연주하기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살아가지 않겠는가?
내가 내 인생을 연주하려고 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이 일어날 때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려 애썼지만, 진탕 고생만 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도 그랬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5)."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다(요 10:15).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다. 아무리 의심되는 상황일지라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내 인생의 연주자로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좋은 악기가 있어도 잘 다룰 줄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 좋은 사람인데, 때때로 더 좋은 인생으로 만들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연주하는 데는 어떤 사람도 문제 될 게 없다. '기대되지 않는 사람'도 문제가 없고,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람'도 바꾼다.
다윗은 가족에게 주목받지 못했다. 사울 왕의 집요한 추격을 받고 도망 다니기도 했다. 주변에 억울하게 상처를 받은 별볼 일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들과 신하들의 반역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하여 미친 짓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쓰시는데 문제 될 게 없었다. 하나님은 능숙하게 훈련하셨다. 다윗에게 최대의 숙제는 철저하게 선한 목자의 손에 의탁하며 사는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면 누구나 가능하다. 갈릴리 어부들의 인생을 연주하기도 하셨다. 창기도, 세리도, 세리장 삭개오도, 간음한 여인도, 수많은 남자들에게 버림받은 수가 성 여인도, 각종 질병을 가진 사람들의 인생도 연주해 주셨다. 교회와 성도를 죽이려고 핍박하던 사울의 인생도 연주해 주셨다. 주님이 연주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연주해 주셨다. 부모를 속이고 인간적인 욕심에 끌려 살던 야곱을 연주해주셨다. 형제들에게 팔려서 외국의 노예생활을 했던 요셉의 인생도 연주하셨다. 한편으로 교만하고, 한편으로 상처에 대한 아픔으로 똘똘 뭉친 모세의 인생도 다듬어 주셨다. 열등감을 갖고 있던 여호수아의 인생도 연주해 주셨다. 이방 나라 모압 여인 룻의 인생도 연주하셨고, 기근으로 베들레헴을 떠나 남편과 두 아들과 모든 소유를 다 잃고 온 나오미의 인생도 연주해 주셨다.
목자가 있다고 '어려운 일'이나 '답답한 길'이 없는 건 아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도 있다(4절). '원수의 목전'에 놓일 수도 있다(5절). 그러나 '害(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4절).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책임지고 인도하고, 돌아본다. 해하려는 도둑이나 짐승들을 대항할 것이고, 위험한 상황에서 건져낼 것이다. 웅덩이나 절벽에 빠져 있을지라도 건져낸다.
명연주자이신 주님의 연주법은 아주 다양하다. 내가 알고 있는 한두 가지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 요셉처럼, '고난과 깊은 상처'를 통해 우리를 연주해 가신다. 베드로처럼,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도 우리를 연주해 가신다. '좋은 사람' 뿐 아니라, '악한 사람, 까다로운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를 연주해 가신다. '좋은 환경' 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환경'을 통해서도 우리를 연주해 가신다.
어느 권사님은 십수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하셨다. 물론 아직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가신다. 병원에서 진단이 내려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하나님,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앞으로 남은 삶을 전도하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새벽제단도 쌓겠습니다.'
하나님은 권사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 지금껏 전도왕으로 섬기고 계신다. 약속대로 새벽제단을 빠지지 않고 드린다. 지방을 가더라도 본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려고 올라오신다. 질병을 통해 새로운 인생으로 연주해 주신 게다.
우리는 주님의 연주 앞에서 불평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다. 사업 실패, 시험 불합격, 승진 실패 등. 이런 것들이 힘들기는 하지만, 주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방법이니 기쁨으로 '수용'해야 한다.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앞에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 나'를 만들어가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분노할 필요 없다. 그것을 통해서도 멋진 연주를 해 나가시니까. '하나님은 왜 나한테 이런 질병을 주시는 거야?' '하나님은 나한테 왜 돈을 많이 주시지 않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왜 빼앗아가는 거야?'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선한 목자에 대한 우리의 신뢰이다. 그분을 신뢰한다면, 그분의 연주 실력을 인정한다면, 문제 될 것 없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어도, '언젠가' 반드시 이해되고 감사할 때가 올 테니까. 토기장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릇을 빚어가실 거니까.
김병태 목사(성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