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2-3] 행위 아닌, ‘공로’가 문제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은 부자 청년 이야기를 다 아실 겁니다. 어느 날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묻는가? 선한 분은 오직 한 분이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청년은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우리 같으면 이 청년을 보고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 바로 제자 삼았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나 주님은 한 가지를 더 요구하십니다.
"그렇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그랬더니, 이 청년은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마 19:16-22).
이 이야기는 오늘 날 버전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청년: "주님,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고, 그 모든 행위는 결국 저에게 공로로 남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을 믿습니다. 저의 행위가 공로가 되지 않도록, 저를 내버려 두소서."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납니다. 한 청년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자원하여 군인이 되지요. 그는 전쟁에 나가기 위해 수많은 훈련을 받습니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전쟁터로 나가기 직전, 그는 말합니다.
병사: "제가 그동안 많은 훈련을 받았지만, 저의 행위가 공로가 되지 않도록 전쟁터로 나가지 않게 하소서."
상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병사: "만약 제가 전쟁에 나가 승리라도 하고 돌아오면, 그것은 너무 쉽게 행위가 될 것이고 결국 이 행위는 저에게 공로로 남게 될 것입니다. 국가는 저에게 훈장도 수여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행위가 공로가 되는 일이 없도록, 전쟁에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병사는 제정신일까요? 정신이 올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그 당시 기독교의 상태가 이랬다는 겁니다.
중세 시대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구원에 있어 '행위'의 강조였습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교회가 개혁되어야 했다면, 중세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가장 큰 변질은 행위는 남기고 공로만을 제거해야 했거늘, 공로와 함께 '행위'를 제거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일들은 루터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루터가 야고보 서신을 행위를 강조했다고 하여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하며 폄훼했을지라도 그는 잘못이 없다는 겁니다. 행위의 제거는 루터 이후에 나타난 루터 해석자들의 만행이었지요.
그들은 공로와 함께 행위까지도 몽땅 제거했습니다. '싸구려 복음'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행위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행위는 너무나 쉽게 공로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행위를 아예 제거해버리고 나면, 공로를 주장할 수도 없을 것이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행위를 제거하고 나니,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너무 쉬워졌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돼. 어때? 너무 쉽지. 이 세상의 보험은 이 땅의 생활만 보장해 주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아. 그런데 이 보험 어때? 매월 납입금도 없어. 그래,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만, 공짜야. 자, 여기에 믿는다고 사인만 하면 돼. 안 믿는 게 바보야.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데."
그 이후에 나타난 어떤 담론도 행위에 대한 관심은 없었지요. 키에르케고어는 기독교 세계에 다시 한 번 행위를 온전히 세워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떠안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행위를 말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어떻게 행위를 세워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행위를 세우고 행위가 공로가 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걸까요?
예를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고 왔지만, 상이군인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국가는 당연히 국가를 위해 희생당한 상이군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연금도 주고 평생 국가가 책임지지요. 그의 공로를 인정한 결과죠. 만약 상이군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 마디로 그건 나라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부자 청년이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다면, 부자의 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다시 말해, 행위와 공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부자 청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았다면,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행위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공로를 불러오게 되어 있지요. 한 마디로, 행위에서 공로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리 불가능한 행위와 공로를 어떻게 분리할 수 있는 걸까요? 다음 시간에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한 주 동안도 행위 앞에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